5화
금 간 장부
갭돌이의 사무실은 강남역에서 걸어서 7분 거리, 1층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는 오피스텔 14층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붙은 분양 광고에는 '역세권 수익형 오피스텔, 임대수익 보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장이라는 단어를 보면 나는 늘 반대로 읽는다. 십 년 전 분양 설명회 전단에도 그 단어가 있었다.
1407호. 문에 명패는 없었다.
"사장님!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갭돌이는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집 겸 사무실인 모양이었다. 원룸 한쪽에 접이식 침대가 세워져 있었고, 반대쪽 벽에는 철제 캐비닛 두 개, 그 앞에 책상 하나. 책상 위에는 도장이 열 개쯤 굴러다녔다. 막도장, 인감도장, 법인 도장. 모양이 전부 달랐다.
나는 의자에 앉으면서 습관대로 세 군데를 봤다. 신발 대신 슬리퍼였고, 손은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눈은 피곤해 보였다. 사기꾼도 일은 한다.
"커피 드실래요? 캡슐이에요."
"아, 저는 믹스만 마셔서요."
"믹스는 없는데. 아, 잠깐만요."
갭돌이가 캐비닛 문을 열고 뒤지더니 노란 커피믹스 하나를 꺼냈다. 어디서 받은 건지 포장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나는 그걸 받아 들고 고맙다고 했다. 사기꾼 사무실에서 받은 커피믹스는 처음이었다.
맛은 똑같았다.
리스트는 A4 두 장짜리 엑셀 출력물이었다.
갭돌이가 책상 위에 그걸 펼쳐 놓았다. 던전 번호, 위치, 표시 등급, 매입가, 현재 상태. 전부 열두 줄이었다. 나는 맨 위부터 천천히 읽었다.
신림 7-2, C, 전세 중. 봉천 2-8, C, 공실. 신림 4-11, C, 전세 중. 사당 3-1, C, 전세 중. 봉천 5-6, B, 전세 중.
B도 있었다. 하지만 봉천 5-6의 감정사 이름도 허위정이었다.
"사장님 손님한테는 이 중에 봉천 5-6 추천해요. B급인데 전세가 1억 2천이면 진짜 싼 거예요. 이거 전세 시세가 원래 2억이에요."
"우와, 그러네요."
나는 감탄하는 척하며 계속 내려갔다. 상태 칸에 '이전 예정'이라고 적힌 게 둘이었다. 7-2와 사당 3-1. 날짜는 둘 다 다음 주 수요일.
수요일.
책상 옆 벽에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었다. 거기에도 수요일이 적혀 있었다. '수 — 7-2, 3-1 명의 / 바지 김○○ 도장 받기 / 오전 11시 등기소.' 지우다 만 글씨 몇 줄이 그 위에 희미하게 겹쳐 있었다. 지난번 이전 때의 일정일 거다.
나흘이었다.
리스트 맨 아래, 열두 번째 줄에서 내 눈이 멈췄다.
신림 9-4, F, 매입가 0원, 처분 예정.
"이건 뭐예요? 매입가가 0원인데요."
갭돌이가 리스트를 들여다보더니 하품을 했다. 진짜 하품이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까지 찔끔 나오는.
"아, 그거요. 그거 던전이 아니라 폐공장이에요."
"폐공장이요?"
"신림 9동 산 밑에 망한 염색 공장 하나를 작년에 샀거든요. 땅만 보고요. 그 동네 재개발 소문이 있어서. 근데 사고 보니까 지하에 던전이 붙어 있는 거예요. 땅에 귀속되니까 그냥 딸려 온 거죠. 그래서 매입가 0원."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던전 하나가 공짜로 생긴 건데."
"좋긴요. 감정 받아 봤는데 F예요. 허 감정사님 말고, 그때는 그냥 공단 감정사한테 받았거든요. 진짜 F. 거기다 물이 새요."
"물이요?"
"던전 안에서 물이 계속 새요. 벽에서. 들어가면 발목까지 차요. 몬스터는 슬라임 몇 마리고. 전세를 놓으려 해도 이건 사진만 봐도 다들 안 해요. 물바다니까."
갭돌이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슬리퍼를 신은 발을 책상 모서리에 걸쳤다.
"그래서 그거 1억이면 팔아요. 공장 땅까지 같이요. 재개발 소문도 요즘 쑥 들어갔고. 사장님, 혹시 그런 거 사는 사람 있으면 소개해 줘요. 그것도 수수료 두 배."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스트의 열두 번째 줄을 한 번 더 봤다.
허위정 도장이 찍히지 않은 유일한 던전이었다. 갭돌이가 C를 만들어 팔 생각조차 안 한 유일한 던전.
진짜 F일 수도 있었다. 갭돌이 말대로 물바다에 슬라임 몇 마리가 전부인 쓰레기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사기꾼이 하품하면서 내놓는 매물은 대개 사기꾼도 그 값을 모르는 매물이다. 그런 매물이 나중에 누구 손에서 얼마가 됐는지, 이 동네에서 십 년 동안 여러 번 봤다.
그리고 나는 그 값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단, 그 앞에 서야만.
그때 갭돌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본 갭돌이가 발을 책상에서 내리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목소리가 반 톤 올라갔다.
"아, 감정사님! 네, 네. 차갑돈입니다."
허위정이었다.
나는 리스트를 보는 척했다. 갭돌이는 몸을 돌려 창가 쪽으로 걸어가면서 통화했다. 원룸이라 다 들렸다.
"네, 다음 주 사당 거 두 건이요. 네, 그 건물주가 급하대서요. C로 부탁드리고요. …아, 네. 지난번이랑 같이요. 현금으로. 네네."
"…네? 아, 위에서요? 아뇨, 아직 연락 없으셨는데. 네, 오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감정사님, 근데 한 건 더 있는데 B로 가능할까요? …아, B는 안 돼요? 요즘 보증보험 쪽에서 B부터는 재감정을 붙인다고요. 네, 그럼 C로요. 알겠습니다."
통화는 2분이 안 걸렸다. 갭돌이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더니 다시 슬리퍼 신은 발을 책상에 올렸다.
"감정사님이 요즘 까다로워지셨어요. B급부터는 보험사가 다른 감정사를 한 번 더 보낸대요. 그래서 C까지만 해 주신대요."
"그분도 위에서 연락받으세요?"
갭돌이가 나를 힐끗 봤다.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 그러다 금방 웃었다.
"사장님, 그건 나중에. 같이 오래 하다 보면 다 알게 돼요."
나는 리스트를 넘기는 척하며 방금 들은 걸 정리했다. C 도장은 현금으로 사고, B부터는 재감정이 붙으니 C까지만 부풀린다. 그리고 감정사 위에도 누가 있었다.
"사장님, 손님은 언제 데려오세요? 이번 주에 봉천 5-6 보러 올 수 있어요?"
"네. 월요일쯤 연락드릴게요."
"월요일이요. 좋아요."
갭돌이가 나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슬리퍼 소리가 복도에 찰박찰박 울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 갭돌이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사장님, 우리 오래 같이 해요. 사장님 같은 분은 진짜 귀해요. 동네에서 오래 하셔서 사람들이 믿어 주잖아요. 그게 제일 비싼 거예요."
"…그렇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14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나는 벽에 붙은 분양 광고의 '보장'이라는 글자를 보고 있었다.
동네에서 오래 해서 사람들이 믿어 준다. 갭돌이 말이 맞았다. 그게 제일 비쌌고, 갭돌이는 그걸 50만 원에 사려고 했다. 그 50만 원은 이미 김 사장 금고에 들어가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았다. 나는 분양 광고를 등지고 내렸다.
강남역에서 신림까지 지하철로 30분이 걸렸다. 나는 그동안 휴대폰 계산기를 두드렸다.
철호 보증금 8,000. 한소영 6,000. 합쳐서 1억 4,000. 7-2가 수요일에 바지 앞으로 넘어가면 철호 거는 끝이다. 4-11도 언젠가 같은 길로 간다.
갭돌이가 가진 것 중에 진짜 돈이 되는 게 있어야 거기에 가압류를 걸든 뭘 하든 할 수 있다. 그런데 리스트 열두 줄 중 열한 줄이 허위정 도장이었다. 내 눈으로 본 셋은 다 F였다. 나머지도 다 그럴 거다.
갭돌이 재산은 전부 깡통이었다.
깡통이 아닐지도 모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매입가 0원, 물 새는 폐공장 지하. 갭돌이가 하품하면서 1억에 내놓은 던전.
만약 그게 진짜 F가 아니라면.
나는 그 생각을 끝까지 하지 않으려고 했다. 끝까지 하면 다음 생각이 따라왔다. 만약 그게 진짜로 돈이 된다면, 그걸 갭돌이한테서 뺏어 철호와 한소영의 보증금을 돌려주는 대신, 그냥 내가 사면 어떨까 하는 생각.
1억이면 B급 하나 값도 안 된다. 진짜 등급이 높다면 몇 배가 될 거다. 월세 걱정도, 카드론 걱정도, 김 사장 마침표도 한 번에 끝난다.
신림역에 내렸다. 4번 출구로 나와 골목을 두 번 꺾으면 사무실이었다. 나는 거기서 반대쪽으로 꺾었다. 신림 9동 산 밑으로 가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그쪽에 있었다.
내 통장에는 1억이 없었다. 있는 건 카드론 130만 원과, 다음 달까지 내야 할 월세 180만 원이었다.
마을버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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