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특약
밤 열한 시, 나는 사무실 책상에 계약서 양식을 펴 놓고 앉아 있었다. 젖은 바지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 말리는 중이었다. 반바지 차림으로 계약서를 쓰는 건 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커피믹스는 오늘 아홉 잔째였다.
먼저 등기부부터 뗐다. 신림 9-4, 대성염색 공장 부지. 소유자 차갑돈. 소유권 이전 작년 5월. 매매 대금 1억 1천만 원. 근저당 없음, 가압류 없음.
깨끗했다. 대출 한 푼 없이 현금으로 산 땅이었다.
작년 5월이면 철호가 7-2 전세 계약을 하기 반년 전이었다. 한소영이 4-11 계약을 한 건 작년 4월이었다. 갭돌이는 4월에 한소영한테 6,000을 받고, 5월에 이 땅을 현금으로 샀다. 그리고 11월에 철호한테 8,000을 받아 또 어딘가를 샀겠지.
1억 1천 중 절반 넘게, 한소영의 신혼집 돈이 이 공장 땅이 되어 있었다. 그 지하에 B급 던전이 있다는 건 갭돌이도 한소영도 몰랐다.
나는 볼펜으로 등기부의 매매 대금 칸을 톡톡 쳤다. 계약서를 톡톡 치는 건 오래된 버릇이다. 생각이 막힐 때 나오는 버릇이다.
문제는 갭돌이가 왜 이 땅을 내놓느냐였다.
갭돌이 입장에서 보면, 철호와 한소영한테 줄 돈은 줄 필요가 없는 돈이다. 7-2와 4-11을 바지 사장 앞으로 넘기면 보증금 반환 의무도 같이 넘어간다. 던전관리법이 그렇게 돼 있다. 집이랑 똑같다. 새 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줘야 한다. 새 주인이 신용불량자면 끝이다.
그러니까 갭돌이는 철호와 한소영한테 땅을 줄 이유가 없다. 돈을 안 줘도 되는데 왜 땅을 주겠나.
이유가 하나 있었다.
나는 노래방에서 갭돌이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 애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더라고요. 지웠던데, 이미 다 봤죠. 철호의 글에는 봉천동 피해자, 사당동 피해자가 댓글을 달았었다. 갭돌이는 그걸 봤다. 그리고 그 글이 올라오고 20분 만에 아이디가 제각각인 댓글들이 달렸다.
갭돌이는 피해자들이 모이는 걸 무서워한다.
바지 사장 앞으로 명의를 넘기면 보증금은 안 돌려줘도 된다. 그런데 피해자 여럿이 모여서 사기로 고소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민사는 바지가 막아 주지만, 형사는 못 막는다. 사기죄는 갭돌이 이름으로 따라붙는다. 그리고 경찰이 갭돌이 통장을 뒤지면, 그 위에서 돈 대 주는 사람 이름까지 나올 수 있다.
갭돌이가 땅을 내주고라도 사고 싶은 건 조용함이었다.
나는 계약서 양식 맨 위에 적었다. 매매 계약서. 그리고 그 밑에 한 장을 더 붙였다. 합의서.
계약서는 세 시간이 걸렸다.
매도인 차갑돈. 매수인 나철호, 한소영. 목적물 신림 9-4 공장 부지 및 지하 던전 일체. 매매 대금 1억 4천만 원.
1억 4천. 갭돌이가 하품하며 부른 1억보다 4천을 더 얹었다. 철호와 한소영의 보증금을 합친 금액이다. 나는 그 숫자를 쓰다가 웃음이 나왔다. 물 새는 F급 던전을 4천 더 주고 사겠다는 손님이라니. 갭돌이는 그걸 보고 웃을 거다. 웃게 둘 생각이었다.
지급 방법. 매수인이 매도인에게 가진 전세 보증금 반환 채권 1억 4천만 원과 대등액으로 상계한다.
현금은 한 푼도 오가지 않는다. 갭돌이는 1억 4천을 갚은 셈이 되고, 철호와 한소영은 1억 4천짜리 땅을 받는다. 서류상으로는 공평하다. 서류상으로는.
합의서. 매수인은 본 계약으로 신림 7-2, 신림 4-11 전세 보증금 관련 민·형사상 청구를 하지 않는다.
여기서 볼펜이 한참 멈췄다. 이 한 줄이 갭돌이가 사는 물건이었다. 조용함. 그리고 이 한 줄 때문에 철호와 한소영은 갭돌이를 처벌할 기회를 잃는다. 한소영이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나라면 안 받아들인다.
나는 그 줄 끝에 단서를 하나 달았다. 단, 본 합의는 매수인 2인의 위 2건에 한하며, 제3자의 청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봉천동 피해자, 사당동 피해자는 여전히 고소할 수 있다. 갭돌이가 사는 조용함은 반쪽짜리다. 그걸 갭돌이가 알아챌지는 모르겠다. 사기꾼들은 대개 계약서를 끝까지 안 읽는다. 자기가 쓴 게 아니면.
그다음이 특약이었다.
특약 1항부터 6항까지는 평범하게 썼다. 인도 일자, 등기 이전 비용, 공과금 정산. 어느 계약서에나 들어가는 것들이다.
특약 7항에서 나는 볼펜을 내려놓고 커피믹스를 하나 더 탔다. 열 잔째였다.
7항이 이 계약서의 전부였다.
매매 목적물은 계약일 현재 상태대로 인도하며, 매수인은 공인 감정서상 등급(F)을 확인하였다. 추후 감정 결과 및 매장 자원이 계약일 현재 공인 감정서와 다르게 확인되더라도, 매도인과 매수인은 이를 이유로 계약의 해제, 취소 또는 대금의 증감을 청구할 수 없다.
갭돌이가 읽으면 이렇게 읽힐 거다. 나중에 F급보다 더 나쁜 깡통인 게 드러나도 너네가 물러 달라고 못 한다. 매도인 보호 조항. 갭돌이는 좋아할 거다.
그런데 이 문장은 양쪽으로 읽힌다. 나중에 F급보다 더 좋은 게 드러나도, 갭돌이 역시 돌려 달라고 못 한다.
나는 7항을 세 번 고쳐 썼다. 단어 하나라도 한쪽으로 기울면 갭돌이가 눈치챈다. 양쪽에 똑같이 무겁게. 저울처럼.
마지막으로 중개보수 조항을 썼다. 매도인 측 중개보수 중 금 50만 원은 개업공인중개사가 기수령하였으므로 이를 공제한다.
서류철 사이에서 빈 봉투를 꺼냈다. 갭돌이가 노래방에서 쥐여 준 그 봉투였다. 안에 든 50만 원은 이미 김 사장 금고에 들어갔다. 봉투만 남았다.
이 한 줄이면 그 50만 원은 중개보수 선금이 된다. 갭돌이가 나한테 낼 돈을 미리 낸 셈이다. 그리고 계약서에 적히는 순간, 나는 그 50만 원 때문에 갭돌이 편에 설 이유가 없어진다.
나는 빈 봉투를 계약서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참 그걸 봤다.
새벽 두 시에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아들, 자냐."
"안 자요. 일해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을 해. 부동산이 밤에도 하냐."
"계약서 써요."
아버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시골에서 소를 키우는 사람은 새벽 두 시에 일어나는 일이 흔하다. 소가 새끼를 낳을 때. 아버지 쪽 수화기 너머로 외양간 소리가 들렸다.
"테레비 보니까 요새 던전도 사고판다더라."
"네."
"너도 그거 하냐."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래. 근데 아들."
아버지가 하품을 했다. 길게.
"던전도 팔면, 소는 언제 키우냐."
나는 웃었다. 이번엔 진짜로 웃었다. 아버지는 내가 왜 웃는지 몰랐을 거다. 아버지 머릿속에서 서른넷짜리 아들은 아직도 언젠가 시골에 내려와 소를 키울 사람이었다. 십 년 전 상가를 날렸을 때도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내려와서 소나 키우라고.
"아빠, 소는 다음에요."
"다음에 언제."
"이 계약 끝나면요."
아버지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콧바람을 뿜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계약서를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1조부터 특약 7항까지. 빈 봉투는 계약서 위에 그대로 있었다.
창밖의 신림동 골목은 조용했다. 길 건너 왕 사장네 간판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프린터에 종이를 채워 넣고 출력 버튼을 눌렀다. 매매 계약서 세 장과 합의서 한 장이, 두 번씩 천천히 밀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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