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콩팥 두 개
저녁 7시, 도윤은 PC방 구석 창가 자리에서 휴대폰 두 대를 양쪽 귀에 번갈아 댔다. 한 대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되어 있던 연예기획사 인사팀, 다른 한 대는 은행 대출 상담 창구였다.
"네, 팀장님. 한도윤입니다. 네, 다음 주 입사 건으로요. …아뇨, 다른 데 붙은 건 아니고요. 네. 제가 사업을 좀 해 보려고요. …무슨 사업이냐고요? 매니지먼트요. 네, 똑같은 거요. 대상만 좀 다르고요."
"…아뇨, 팀장님 회사가 싫어서가 아니라요. 오히려 팀장님 회사가 너무 좋은 회사라서요. 제가 거기 들어가면 10년은 안 나올 것 같아서요. …네, 칭찬 맞아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업계에서 뵈면 제가 밥 살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다른 휴대폰에서 대기음이 끝나고 상담원의 목소리가 나왔다. 도윤은 몸을 반쯤 돌려 그쪽 귀를 댔다.
"네, 신용대출 한도 조회 부탁드립니다. 직업이요? …지금 막 무직이 됐습니다. 네, 방금요. 3분 전에요."
상담원이 정중하게 상담을 마무리하는 동안, 도윤은 창밖의 사거리를 내려다봤다. 전생에서 이 은행은 3년 뒤 헌터 전용 대출 상품을 내놓으면서 광고 모델로 제우스 소속 헌터를 썼다. 지금은 무직자 한 명에게 한도 0원을 안내하고 있었다.
"네, 다음에 다시 조회할게요. 3년쯤 뒤에요."
말순 PC방은 24시간 영업이었다. 그런데 새벽 2시부터 4시까지는 사장님이 카운터 뒤 간이침대에서 눈을 붙이는 시간이라, 단골들은 그 시간에 라면을 시키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도윤은 그 불문율을 어기기로 했다. 다만 시간은 피했다. 밤 11시, 손님이 셋으로 줄고 할머니가 그날 매출을 손으로 장부에 옮겨 적는 시간이었다.
"사장님."
"라면이면 셀프다."
"라면 아니고요. 투자 얘기요."
오말순이 볼펜을 멈췄다. 돋보기를 코끝으로 내리고 도윤을 봤다. 아침에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오래, 훨씬 꼼꼼하게.
"총각, 니 오늘 하루 종일 우리 가게에 있었제."
"네."
"점심때 태하 데리고 나가서 신림역에 구멍 나는 거 맞혔고, 오후 내내 계약서 붙잡고 있었고, 저녁엔 구석에서 전화만 두 대로 돌리고."
"다 보셨네요."
"내 가게다. 다 본다."
할머니는 장부를 덮었다. 그리고 카운터 밑에서 의자 하나를 꺼내 도윤 쪽으로 밀었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도윤은 앉아서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오후에 태하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했다. 4월 30일, 오후 4시쯤, 저 앞 사거리. 1층 유리창. 그리고 그 위의 2층.
오말순은 끝까지 듣고 나서 한마디만 했다.
"그거 내가 믿으면 태하가 사인한다 캤나."
"…들으셨어요?"
"내가 귀가 어두운 줄 알았나. 손님들 욕하는 소리까지 다 들린다."
할머니는 카운터 위의 계산기를 집어 들었다. 숫자를 누르지는 않고, 손안에서 굴리기만 했다.
"총각, 내가 이 가게를 몇 년 했는지 아나."
"30년이요."
"28년이다. 그 전에는 오락실이었고, 그 전에는 만화방이었다. 그 사이에 망한 건 두 번이다. 한 번은 IMF 때, 한 번은 내 남편이 보증 서 줬을 때."
계산기가 손안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 두 번 다, 누가 와서 '사장님, 이거 꼭 됩니다' 캤다. 둘 다 양복 입고 왔고."
도윤은 넥타이를 내려다봤다. 오늘 아침에 공들여 맨 넥타이였다.
"그래서 니 말은 안 믿는다."
"네."
"근데 오늘 낮에 신림역 그거는 내 눈으로 봤다. 그건 믿는다."
할머니가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믿는 거하고 돈 거는 거는 다르다, 총각. 니 지금 나한테 믿어 달라는 기가, 돈 걸어 달라는 기가."
도윤은 잠깐 할머니를 봤다. 10년 동안 기획사 사장님들한테 들은 어떤 질문보다 정확했다.
"돈 걸어 주세요."
"얼마."
"3천만 원이요."
카운터 뒤 냉장고가 웅 하고 돌기 시작했다. 손님 셋 중 하나가 마우스를 탁 내려놓았다. 할머니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니 내가 돈 주면. 그 돈으로 뭐 할긴데?"
도윤은 수첩의 다음 장을 펼쳤다. 지난밤 계약서를 쓰고 나서 새벽 4시까지 적어 둔 것이었다.
"사무실이 필요해요. 사람이 모일 곳이요. 그리고 장비요. 지금 헌터들은 다 맨몸으로 들어가요. 보호구 하나 없이. 그리고 병원 검진비, 교통비, 보험이요. 보험은 아직 상품이 없어서 제가 따로 적립해 둬야 하고요."
"그거 다 3천으로 되나."
"안 돼요. 석 달 버티면 다행이에요."
"석 달 뒤에는."
"석 달 뒤엔 태하가 돈을 벌어요. 헌터관리공단이 생기면 게이트 공략에 정부 보상금이 붙어요. 그리고 기업 협찬이요. 처음 TV에 나온 헌터한테 음료 회사가 얼마를 줬는지 제가 알거든요."
"얼마 줬는데."
"1년 계약에 1억 2천이요."
할머니의 눈썹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게 언젠데."
"올해 가을이요."
그 1억 2천을 받은 건 제우스의 다른 헌터였다. 도윤은 그 이름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오말순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2층."
"네?"
"우리 건물 2층. 원래 당구장이었는데 작년에 망해가 비었다. 건물주는 내다. 세 안 받고 빌려주께."
도윤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사무실 문제가 3초 만에 해결됐다.
"대신."
할머니가 손가락을 내렸다.
"지분으로 줘라."
"…몇 퍼센트요."
"30."
도윤은 지분이 얼마가 적당한지 몰랐다. 10년 동안 기획사 지분 얘기는 늘 사장님들끼리 했고, 매니저는 그 방 밖에서 기다렸다. 그래도 30이 큰 숫자라는 것쯤은 알았다. 회사 이름도 없는 매니저가, 소속 헌터도 없이, 3주 뒤를 맞히겠다고 앉아 있었다.
"20이요."
"30."
"사장님, 30은 너무… 저도 뭐가 남아야…."
"총각, 니 지금 가진 기 뭐 있노."
"…."
"계약서 열네 장. 수첩 하나. 넥타이."
할머니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셋에서 멈췄다.
"그리고 아직 사인 안 한 태하."
도윤은 웃었다. 졌다는 걸 인정하는 웃음이었다.
"…25요. 대신 일은 제가 하는 대로 두시고요."
"내가 경영을 와 하노. 나는 돈만 센다."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굵고 마디가 불거진 손이었다. 도윤은 그 손을 잡았다. 악력이 셌다.
"25. 그리고 하나 더."
"네."
할머니가 손을 놓지 않은 채 도윤을 끌어당겼다. 돋보기 너머로 눈이 가까워졌다.
"돈 날리면 니 콩팥 판다. 알제?"
"…하나요?"
"두 개 다."
태하는 구석 자리에 있었다. 게임은 켜져 있었지만 캐릭터는 마을 한가운데 멈춰 서 있었다. 마우스 위에 손이 올라가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카운터 쪽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오말순이 카운터에서 소리쳤다.
"태하야."
"…네."
"나는 3천 걸었다. 니는 뭐 걸끼고."
태하가 의자를 돌렸다. 할머니를 보고, 도윤을 봤다. 그리고 창밖의 사거리를 봤다. 밤 11시 40분, 신호등이 빈 횡단보도 위에서 혼자 초록에서 빨강으로 바뀌고 있었다.
"…할머니, 그거 믿어요? 사거리 거."
"모른다. 근데 신림역 거는 맞았다."
"그럼 그날 가게 닫아요?"
"안 닫는다."
"할머니."
"대신 그날 내가 1층 유리 앞에 안 서 있으면 될 거 아이가. 니가 서 있으면 되고."
태하가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시 장부를 펴고 볼펜을 들었다. 오늘 매출, 35만 2천 원. 그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투자, 3천만 원. 그 옆에 괄호를 치고 작게 적었다. 콩팥.
태하가 도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약서요."
도윤은 서류 봉투를 열었다. 오후에 고친 오타 여덟 개가 볼펜 자국으로 남아 있는 열네 장. 태하는 마지막 장을 펼치고, 서명란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근데 아저씨."
"네."
"제5조요. 하루 8시간."
"네."
"게임은 그 8시간에 들어가요, 안 들어가요?"
도윤은 잠깐 생각했다.
"안 들어가요. 근데 수면 6시간은 들어가요."
태하가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다. 신림역 정류장 앞에서 12시 14분을 기다릴 때보다 더 오래.
그리고 서명란에 이름을 썼다. 강태하. 글씨가 생각보다 반듯했다.
도윤은 계약서를 받아 들고 서명을 확인했다. 전생에서는 다른 회사 이름 옆에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이번에는 아직 이름도 없는 회사 옆이었다.
"태하 씨, 내일 일정 말할게요."
"…벌써요?"
"오전 9시. 각성하러 가요."
태하가 굳었다. 카운터에서 오말순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몇 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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