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곱 번째 약혼자는 죽지 않는다10화 EN繁中

10화

붉은 원 상회

루미에르의 남부 운하 공사장은 도시의 남쪽 성벽 바깥, 강이 크게 휘어지는 자리에 펼쳐져 있었는데, 삼 년째 이어지는 공사로 강둑의 흙이 온통 뒤집혀 비가 오면 길이 붉은 진창으로 변하였다. 북부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그 흙을 보고 피를 뿌려 놓은 것 같다고 했고, 남부에서 올라온 인부들은 고향 습지의 흙과 똑같다며 웃었다. 루미에르의 다른 어느 곳에도 그런 흙은 없었다.

아델라이드 크로웰은 그 진창 위를 걸으며 여섯 번째 장례식을 떠올리고 있었다. 회색 프록코트를 입은 노아의 먼 친척, 반들반들하게 닦은 구두의 뒤축 안쪽에 엷게 말라붙어 있던 붉은 흙. 그 흙이 이 흙이었다. 그 남자가 무슨 일로 장례식 전에 이곳에 들렀는지는 아직 그녀의 공책에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오늘 영애의 옷을 입고 오지 않았다. 하녀들이 입는 회색 겨울 망토를 걸치고, 머리는 수수하게 땋아 내렸으며, 손에는 장바구니 하나를 들었다. 마부에게는 셀린과 의상실에 간다고 했고, 의상실 앞에서 셀린에게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셀린은 그 말을 믿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붙잡지도 않았다. 언니가 빠지면 의상실의 좋은 비단을 혼자 고를 수 있었으니까.

붉은 원 상회는 공사장 인부들의 숙소가 늘어선 거리 끝, 운하 선착장 바로 앞에 있었는데, 간판에 붉은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고 열린 문 너머로 곡물 자루와 말린 과일과 향신료 단지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남부에서 배로 올라온 물건을 받아 도시로 넘기는 도매상다운 모양새였다.


상회 주인은 남부 사투리가 짙은, 배가 나온 중년 사내였는데,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손바닥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하녀 차림의 손님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이, 사들일 사람인지 그냥 구경하러 온 사람인지를 재는 데 익숙해 보였다.

"뭘 찾으시우?"

"저, 저희 마님께서… 예전에 여기서 귀리를 사셨다고 해서요. 말에게 먹이는 거요. 그때 그 귀리를 다시 좀 사 오라고 하셔서."

아델은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장바구니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작게, 끝은 떨리게 내는 그 목소리는 사교계에서 쓰던 것과 똑같았는데, 그것이 하녀 차림에도 그대로 어울린다는 것을 그녀는 오늘 처음 알았다.

"귀리야 많지. 어느 댁인데?"

"크로웰 공작가요."

상회 주인의 손이 앞치마 위에서 멈추더니, 그는 상회 안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 그 댁. 그럼 그 특별한 거 말이우?"

"…특별한 거요?"

"아가씨 같은 하녀가 왜 그걸 모르나. 지난번에 그 댁에서 사 간 거 말이야. 귀리 한 자루에, 따로 싸 준 거."

아델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장바구니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으나 그녀는 그 힘을 풀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하녀의 목소리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저는 새로 들어와서요. 마님께서 '그때 그거'라고만 하셔서…."

상회 주인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한참 보다가 이윽고 어깨를 으쓱하였다. 크로웰 공작가의 이름은 이 거리에서 미심쩍음을 누를 만큼 무거웠고, 그 댁에서 다시 같은 물건을 찾는다는 것은, 지난번에 받은 값을 다시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년도 넘었나. 그 댁 시녀가 왔었지. 공작부인 댁 시녀라고 하더군. 귀리 견본 한 자루를 사 가면서, 따로 부탁을 하나 했어. 말이 기운이 없어서 그러니 기운 나는 풀을 좀 섞어 달라고. 남부 습지에서 나는 거 있잖아. 경마장에선 못 쓰는 거."

"…그걸 섞어 주셨어요?"

"섞어 준 건 아니고. 따로 싸 줬지. 말린 거 한 줌. 알아서 섞으라고. 나는 그런 거 팔기만 하지 섞지는 않아. 섞으면 그건 내 책임이 되니까."

상회 주인은 그 말을 하며, 책임을 지지 않는 법을 오래전에 터득한 사람다운 웃음을 웃었다.

"값은 은화로 치렀어. 귀리 값의 열 배. 그 댁은 역시 통이 크더군. 그래서 기억하는 거야."

"그 시녀분, 어떻게 생기셨어요? 제가… 마님께 말씀드려야 해서요. 같은 사람한테 같은 걸 사 오라고 하신 건지."

"얼굴은 잘 못 봤어. 아가씨처럼 회색 망토를 쓰고 왔으니까. 젊은 여자였고, 북부 말투였어. 아, 그리고 손이 고왔지. 하녀 손치고는. 은화를 세는데 손가락에 굳은살 하나 없더라고. 그래서 시녀인가 보다 했지. 시녀들은 물걸레를 안 잡으니까."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부인의 시녀 엘사는 북부 출신이었고, 회색 망토를 입었으며, 마님의 머리를 빗고 옷을 고르는 일만 했으니 손에 굳은살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해롤드 백작의 장례식이 끝나고 석 달 뒤에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델은 장바구니 손잡이를 쥔 손가락을 하나씩 풀었다가 도로 쥐었다.

"그래서, 그거 또 필요하시우? 요즘은 단속이 심해져서 값이 좀 올랐는데."

"…마님께 여쭤보고 다시 올게요."

빈손으로 나가면 수상하게 보일 것이었으므로 아델은 귀리 한 되를 사서 장바구니에 담았고, 상회 주인은 동전을 받아 세며 다음엔 그 특별한 것도 함께 가져가라고 웃었다.


선착장 옆 계단에 앉은 아델은 장바구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붉은 흙이 섞인 채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다가 망토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검은 공책은 서랍 바닥에 두고 왔으니, 밖에서는 이 수첩에만 적는 것이 그녀의 규칙이었다.

붉은 원 상회. 이 년여 전, 크로웰가 시녀를 자칭하는 젊은 여자가 귀리 견본과 광기풀 한 줌을 따로 구매. 은화, 귀리 값의 열 배. 회색 망토, 북부 말투, 굳은살 없는 고운 손. 공작부인 댁 시녀라고 스스로 말함.

그녀는 마지막 문장에 줄을 긋고 그 위에 다시 썼다. 공작부인 댁 시녀라고 '말했음'.

스스로 공작부인의 시녀라고 밝히는 독살범은 없어.

그런데 상회 주인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어. 이 년이 지났는데도. 은화를 열 배로 받았으니까.

엘사였다면 자기가 누구의 시녀인지 굳이 말할 이유가 없었으니, 말하지 않아도 망토와 말투와 손이 다 말해 주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 여자는 굳이 공작부인 댁 시녀라고 말했고, 남이 이 년이 지나도 기억할 만큼 많은 은화를 치렀다. 마치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바란 사람처럼.

아델이 수첩을 덮자 강바람에 망토 자락이 펄럭였고, 그녀는 그 자락을 손으로 눌러 잡으며 자기가 지금 입고 있는 것이 이 저택의 하인이라면 누구나 입는 회색 겨울 망토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였다. 오늘 그녀가 그것을 입고 하녀 행세를 했듯, 그 여자도 그것을 입고 시녀 행세를 했을 수 있었다.

공작부인이나 엘사일 수도 있었고, 엘사인 척한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었다. 아델은 수첩을 다시 펼쳐, 줄을 그은 문장 아래에 한 줄을 보탰다. 어느 쪽이든 구매자는 저택 안에서 나왔음.

그러고는 장바구니를 들고 일어나, 선착장 돌계단 모서리에 구두 뒤축을 대고 거기 묻은 붉은 흙부터 꼼꼼히 긁어낸 뒤에야 의상실로 돌아가는 삯마차를 잡으러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