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제일검의 시종2화 EN繁中

2화

열다섯의 아침

진가장의 주방은 동이 트기 전부터 연기와 김으로 자욱하였으니, 아궁이 세 개에 한꺼번에 불이 들고 가마솥 뚜껑이 들썩일 때마다 쌀 익는 냄새가 서까래를 타고 마당까지 흘러넘쳤다. 하인들은 그 냄새로 하루의 시작을 알았고, 장씨 아주머니의 목청으로 그날의 기분을 가늠하였다.

"말라깽이 왔느냐! 너는 어째 먹여도 먹여도 살이 안 붙는 게야."

장씨 아주머니는 국자를 든 손으로 소한의 등을 떠밀어 부뚜막 옆 낮은 걸상에 앉혔다. 하인들의 밥상은 따로 없었으니 저마다 그릇 하나씩을 무릎에 올려놓고 먹는 것이 이 집의 법도였다. 소한의 그릇에 밥이 수북이 담기더니, 그 위로 장씨 아주머니의 국자가 다른 이들 몰래 한 번 더 지나갔다. 비계가 반쯤 섞인 돼지고기 두어 점이 밥 위에 슬그머니 얹혔다.

전생에서도 그러하였다. 이 사람은 여덟 해 동안 소한의 그릇에만 고기를 한 점씩 더 얹었고, 그 일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화재가 나던 해 겨울에 그녀는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 뒤로 소한의 그릇에 고기를 얹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고맙긴. 누가 들으면 내가 너만 챙기는 줄 알겠다. 얼른 먹어."

그 곁으로 동갑내기 하인 소복이 그릇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볼이 통통하고 눈이 가늘어서 웃지 않아도 웃는 얼굴이었는데, 소한의 밥 위에 얹힌 고기를 보자마자 그 가는 눈이 한껏 커졌다.

"한아, 너 그거 다 먹을 거냐?"

"다 먹을 게다."

"한 점만."

"아니 된다."

"어제는 줬잖아."

소한은 젓가락을 멈추었다. 어제라 함은 열다섯 살의 어제일 것이고, 열다섯 살의 소한은 아마 이 녀석에게 고기를 내주었을 것이다. 마흔다섯 해를 산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히 먼 일이라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소한은 잠시 소복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고기 한 점을 집어 녀석의 그릇에 옮겨 주었다.

"……어제도 주었다면, 오늘도 주어야겠지."

"너 요새 말투가 왜 그러냐? 꼭 우리 아버지 같다."

소복은 고기를 입에 밀어 넣으며 우물우물 말하였다. 소한은 대꾸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열다섯 살의 혀에 닿는 쌀밥은 놀라울 만큼 달았고, 그 단맛 앞에서 그는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아침을 물리고 나서 소한은 빗자루를 들고 안마당으로 나갔다. 안마당은 주인 일가가 거처하는 안채 앞뜰이었으니, 하인들 가운데서도 손이 야무진 자에게만 그 비질이 맡겨졌다. 열 살에 이 집에 들어온 소한이 그 일을 맡게 된 것은 열네 살 되던 해의 일이었고, 그 뒤로 서른한 해 동안 그 빗자루는 단 하루도 그의 손을 떠난 적이 없었다.

봄날 안마당에는 지난밤 바람에 떨어진 매화 꽃잎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소한은 비질을 하였다. 빗자루 끝이 흙을 쓸 때마다 고른 결이 남았고, 그 결은 처마 끝에서 대문 쪽으로 물결처럼 가지런히 이어졌다. 손목에 힘을 빼고 어깨로 쓸어야 결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왕 노인에게 배운 것이었는데, 열다섯의 손목은 아직 그 요령을 다 익히지 못하였는지 이따금 비질이 엇나갔다. 소한은 엇나간 자리로 되돌아가 손목을 고쳐 꺾고 다시 쓸었다.

"한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소한의 빗자루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돌아보니 안채 툇마루 위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연한 쪽빛 저고리 위에 얇은 겉옷을 걸쳤고,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려 비녀 하나만을 꽂았다. 얼굴빛이 조금 창백한 것은 타고난 약질 때문이었으나, 그 눈매만큼은 맑고 또렷하여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이 그 눈을 비켜 가는 법이 없었다.

소한은 빗자루를 세워 들고 허리를 굽혔다. 굽힌 허리를 다시 펴는 데 평소보다 숨 한 번이 더 걸렸다.

전생에서 마지막으로 본 부인의 모습은 불길 너머였다. 안채 지붕이 무너져 내리던 밤, 소한은 마당 한가운데서 물동이를 든 채 그 지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열여덟 살의 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부인,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네가 비질하는 소리에 깼구나. 오늘은 유난히 결이 곱길래 누군가 했더니."

유씨 부인이 툇마루 끝에 앉으며 웃었다.

"요즘 밤에 잠을 설치는 모양이더구나. 눈 밑이 거뭇하다."

"송구합니다."

"송구할 일이 아니라 걱정할 일이지. 왕 집사에게 일러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도록 하마."

"아닙니다, 부인. 괜찮습니다."

부인은 대답 대신 한참 동안 소한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묻고 싶어 하는 눈이었으나, 부인은 소매 끝으로 툇마루의 먼지를 한 번 훔쳤을 뿐 끝내 묻지 않았다.

그때 안채 안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장지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머니! 아버지 벌써 나가셨어요? 오늘은 나도 데려가신다고 하셨는데!"

진서연이 맨발로 툇마루에 뛰어나왔다. 머리는 반쯤만 땋은 채였고, 저고리 고름은 엉뚱한 쪽으로 매여 있었으며, 손에는 어디서 꺾었는지 모를 나뭇가지 하나를 검처럼 쥐고 있었다. 유씨 부인이 이마를 짚었다.

"서연아, 버선은 어찌하고."

"버선은 나중에 신어도 돼요! 아버지는요?"

"뒷산에 가셨다. 너를 데려가신다는 말씀은 하신 적이 없을 텐데."

"어젯밤에 하셨어요. 내가 졸라서 '생각해 보마' 하셨으니까 그건 하신다는 뜻이에요."

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그제야 마당에 선 소한을 발견하였다. 그 눈이 소한의 얼굴에서 빗자루로, 빗자루에서 다시 얼굴로 옮겨 갔다.

"못생긴 한아, 너 아버지 어디 계신지 알지?"

못생긴 한아. 소한은 그 호칭을 얼마 만에 듣는지 셈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이 아가씨는 열세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그를 그렇게 불렀고, 화재가 난 뒤로는 아예 부르지 않았다.

"뒷산 소나무 숲 너머 바위터에 계십니다, 아가씨."

"거기까지 가는 길 알아?"

"압니다만, 가시면 아니 됩니다."

"왜?"

"주인님께서 수련하실 때는 아무도 들이지 않으십니다."

"나는 아무도가 아니잖아. 딸이잖아."

서연은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툇마루를 내려오려다가, 어머니의 시선에 붙들려 도로 주저앉았다. 유씨 부인이 서연의 고름을 바로 매어 주며 나직이 말하였다.

"아버지가 검을 가르쳐 주지 않는 데는 까닭이 있으실 게다."

"무슨 까닭이요? 내가 여자라서요?"

"글쎄다. 그건 아버지께 여쭈어 보려무나."

부인은 웃었으나, 소한은 그 까닭을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진천명이 쉰 살이 넘어서였다. 술이 약한 주인이 한 잔 술에 취해 털어놓은 이야기였으니, 검을 가르친 사람을 검으로 잃은 적이 있어서 다시는 누구에게도 검을 쥐여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끝내 말씀하지 않으셨다.

서연이 갑자기 소한을 노려보았다. 가느다란 눈썹 끝이 잔뜩 치켜 올라가 있었다.

"너, 지금 웃었지."

"웃지 않았습니다."

"웃었어. 입꼬리가 올라갔어."

"아가씨께서 고름을 반대로 매셨던 것이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이게!"

나뭇가지가 날아왔다. 소한은 고개를 반 치쯤 기울였고, 나뭇가지는 그의 귓가를 스쳐 등 뒤 담장에 맞고 떨어졌다. 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씨 부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소한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열다섯 살의 하인이라면 날아오는 나뭇가지에 이마를 맞고 울상을 지었을 것이니, 고개를 반 치만 기울여 흘려보낸 것은 서른 해 가까이 천하제일검의 수련을 지켜본 눈이 한 짓이었다.

그는 서둘러 허리를 굽혀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두 손으로 서연에게 바쳤다. 하인이 주인댁 아가씨에게 물건을 올리는 자세 그대로였다.

"……송구합니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습니다."

"움츠러든 게 아니라 피한 거잖아."

"쇤네가 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서연은 미심쩍은 얼굴로 나뭇가지를 받아 들었다. 다행히도 열세 살 아가씨의 관심은 오래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었으니, 뒷마당에서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들리자 서연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버선도 신지 않은 채 다시 뛰어갔다. 유씨 부인이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눈으로 좇았다.

"한아."

"예, 부인."

"오늘은 정말로 일찍 쉬거라."

부인은 그 말만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한은 장지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굽혔던 허리를 폈다.


해가 중천을 넘어갈 무렵, 소한은 행랑채 뒤편 장독대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는 숯 조각 하나가 들려 있었고, 발치의 판판한 돌 위에는 그가 방금 그어 놓은 금이 몇 줄 있었다.

금은 날짜를 셈한 것이었다. 왕 노인이 말한 오늘의 날짜, 다음 달 열하루가 장 담그는 날이라던 장씨 아주머니의 말, 주인이 다음 달 초에 소주(蘇州) 처가에 다녀오신다는 하인들의 말. 그것들을 전생의 기억에 하나씩 맞추어 보니, 지금은 소한이 열다섯 되던 해의 이른 봄이 틀림없었다.

화재는 열여덟 되던 해 봄, 청명(淸明) 무렵이었다. 손가락으로 꼽아 보면 세 해하고도 한 달 남짓이었다.

소한은 숯 조각으로 돌 위에 세 개의 금을 그었다. 하나는 화재를 막는 일이었다. 하나는 부인을 지키는 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날 밤 담장을 넘어온 복면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금을 다 긋고 나서 바라보니, 셋 가운데 어느 하나도 빗자루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검이 필요하였다. 소한은 판판한 돌 위의 금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웠다. 숯가루가 손바닥에 검게 묻어났다. 그는 그 손을 들여다보았다. 작고 여린 열다섯 살의 손이었다. 이 손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비질하는 법과 걸레 짜는 법, 그리고 서른 해 가까이 귀로만 들어 온 천류검법 열두 식의 검결뿐이었다. 귀로 들은 것을 몸으로 옮겨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하인들이 저녁 상을 물리고, 안채의 등불이 하나둘 꺼지기까지 소한은 하루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해내었다. 유씨 부인이 일찍 쉬라 일렀다는 말을 왕 노인에게서 전해 듣고는, 고맙다는 인사까지 깍듯이 올렸다.

그리고 진가장이 깊은 잠에 들었을 때, 그는 행랑채의 문을 소리 없이 열고 나섰다. 뒷산으로 오르는 길은 달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전생에서 열여섯 되던 해부터 마흔다섯이 되도록 새벽마다 빗자루를 들고 주인의 뒤를 따라 오르던 길이었다. 소나무 숲을 지나 바위터 어귀에 이르자, 주인이 서던 넓적한 바위와 그 아래 소한이 늘 빗자루를 들고 서 있던 구석 자리가 달빛에 젖어 고요하였다.

소한은 그 구석 자리에 섰다. 그리고 한 걸음, 바위 쪽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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