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제일검의 시종5화 EN繁中

5화

걸음

왕 노인은 진가장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가장 늦게 잠드는 사람이었으니, 동이 트기 전 행랑채 마루를 한 바퀴 도는 그의 지팡이 소리가 곧 하인들의 닭울음이었다. 예순여덟의 나이에도 허리가 꼿꼿하였고, 걸음은 느리되 소리가 없었으며, 하인들 가운데 누가 간밤에 늦게 들어왔는지 누가 아침밥을 거르려 하는지를 그 지팡이 끝으로 다 짚어 내었다.

전생에서 소한에게 하인 일을 가르친 것이 이 노인이었다. 빗자루를 손목으로 쓰는 법, 찻물을 부을 때 주전자 주둥이를 잔에서 한 치 띄우는 법, 주인의 기분을 발소리로 읽는 법이 모두 이 노인에게서 나왔다. 소한이 서른 되던 해 집사 자리를 물려받기까지 노인은 그를 이놈 저놈으로만 불렀고, 자리를 물려준 그해 겨울 숨을 거두던 날 아침에야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그 노인이 지금 마당 한가운데 서서 소한의 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놈아."

"예, 집사 어른."

"이리 와서 한번 걸어 보거라."

소한은 빗자루를 세워 두고 노인 앞으로 걸어갔다. 열 걸음쯤 되는 거리였다. 걷는 동안 그는 등 뒤로 노인의 눈길이 발뒤꿈치에 꽂히는 것을 느꼈다.

"다시."

소한은 돌아서서 다시 걸었다. 노인은 지팡이에 두 손을 포개 얹은 채 말이 없었다. 세 번째로 걸었을 때에야 노인이 입을 열었다.

"요즘 걸음이 달라졌구나."

소한은 그 말이 언젠가는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일찍일 줄은 몰랐다.

밤마다 마보로 선 지 스무 날이 지나 있었다. 처음에는 열 호흡도 버티지 못하던 다리가 이제는 일각을 넘겨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으나, 그 대가로 다리가 땅을 딛는 방식이 달라졌다. 발바닥 전체로 땅을 누르듯 디디게 되었고, 무릎이 이전보다 조금 더 굽은 채로 걷게 되었다. 스스로는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였다. 그것을 알아챈 것이 하필 이 노인이었다.

"무릎이 아파서 그렇습니다. 물동이를 많이 져서요."

"물동이는 너만 지느냐. 소복이 놈도 진다."

"소복이는 저보다 살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노인의 흰 눈썹이 한 치쯤 올라갔다. 소한은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하였는지 깨달았다. 거짓말을 할 때면 말이 길어지는 버릇이 이번 생에도 그대로였다.

"이놈 봐라. 살이 많으면 무릎이 덜 아프다는 소리는 내 칠십 평생에 처음 듣는다."

"송구하옵니다. 쇤네가 무지하여 함부로 지껄였사옵니다.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말끝이 쓸데없이 공손해졌다. 노인이 지팡이 끝으로 땅을 한 번 툭 쳤다.

"됐다. 빗자루나 이리 다오."

소한이 빗자루를 건네자 노인은 그것을 받아 들고 마당의 한 귀퉁이를 몇 번 쓸었다. 손목만 까딱하는 듯한 짧은 비질이었는데, 빗자루가 지나간 자리마다 결이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곧게 남았다. 소한은 그 결을 볼 때마다 언젠가는 저렇게 쓸어 보리라 마음먹었고, 전생의 마흔다섯 해를 다 쓰고도 끝내 저 결을 내지 못하였다.

"봐라. 비질은 손목으로 하는 게야. 너는 요즘 어깨로 쓸고 있다."

노인은 빗자루를 돌려주며 소한의 손을 끌어다 자루 위에 다시 얹어 주었다. 자루를 쥔 노인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였으나 쥐는 힘은 젊은 사내 못지않았고, 엄지와 검지 사이며 손바닥 아래쪽에 굳은살이 돌처럼 박여 있었다. 평생 빗자루를 쥔 손이었다. 그 손이 소한의 손목을 한 번 꺾어 보이고는 놓아주었다.

"어깨로 쓰는 놈은 마당을 쓰는 게 아니라 마당하고 싸우는 게다. 싸우면 이기는 놈이 있고 지는 놈이 있지. 마당하고 싸워서 이기는 놈은 내 아직 보지 못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손목으로 하는 게야."


그날 하루 소한은 노인의 눈길을 몇 번이나 느꼈다. 우물가에서 물을 길을 때, 장작을 패고 쌓을 때, 안채 툇마루를 걸레질할 때마다 어디선가 노인의 지팡이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추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면 노인은 다른 하인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거나 처마 끝의 거미줄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그 지팡이 끝은 언제나 소한이 있는 쪽을 향해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소한은 결국 노인에게 불려 갔다. 행랑채 맨 끝, 노인의 방은 하인의 방이라기에는 정갈하였고 집사의 방이라기에는 초라하였다. 벽에는 낡은 지팡이 두어 개가 기대어 있었고,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진가장의 살림 장부가 반듯하게 쌓여 있었다.

노인은 찻잔 두 개에 식은 보리차를 따랐다. 하인이 집사의 방에서 차를 받는 일은 흔치 않았다.

"앉거라."

소한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노인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창호지 너머로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노인의 흰 수염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문지기 영감이 요즘 밤에 졸지를 않는다."

"……예."

"원래 이경만 되면 코를 고는 양반이다. 그런데 요즘은 밤새 눈을 뜨고 있다가도 누가 지나가면 꼭 고개를 돌리고 있단 말이지. 누군가 그 양반한테 못 본 척하는 값을 치른 게야."

소한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식은 보리차의 미지근한 온기가 손바닥에 스몄다. 문지기 영감에게 빗장 높이를 일러 준 것은 열흘 전이었다. 영감의 허리는 그 뒤로 한 번도 삐지 않았고, 영감은 그 값으로 소한이 밤에 드나드는 것을 못 본 척하였다. 그 거래가 이렇게 금세 노인의 귀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침모는 네 옷을 공짜로 기워 주고, 노삼은 너한테 땅콩을 사다 준다. 그 노삼이 말이다. 내가 이 집에서 이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 녀석이 남한테 뭘 사 주는 걸 처음 봤다. 장씨는 네 밥에 고기를 두 점씩 얹고."

"장씨 아주머니는 원래……."

"원래 한 점이었지."

노인의 눈이 찻잔 너머에서 소한을 똑바로 보았다. 그 눈에는 노여움도 의심도 없었다. 다만 오래 묵은 우물의 바닥처럼 깊고 차분하였으니, 소한은 그 눈을 마주하자 전생에서 이 노인 앞에 처음 끌려와 앉았던 열 살 무렵의 자신이 떠올랐다.

"스무 날 사이에 이 집 하인들 절반이 너한테 빚을 졌다. 열다섯 먹은 녀석이 말이다. 그리고 밤마다 어딘가를 다녀온다. 다녀오면 걸음이 달라져 있고."

노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상 위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였다.

"그래서 묻는다. 너 밤마다 누구를 만나느냐."

소한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바위터를 말할 수는 없었다. 하인이 주인의 수련 자리에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매를 맞을 일이었고, 거기서 주인의 검결을 따라 한다는 것은 매로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고 잡아떼기에는 노인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노인이 무엇을 하느냐고 묻지 않고 누구를 만나느냐고 물은 것이 걸렸다. 노인의 머릿속에서 소한의 밤나들이는 이미 사람을 만나는 일로 짜여 있었다.

"……말씀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

소한은 고개를 숙였다. 귀끝이 달아오르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마흔다섯 해를 산 사내가 지금부터 지어내야 할 거짓말이 하필 그런 것이었다.

"부끄러운 일이냐."

"예."

"사람이냐."

"……예."

노인은 한참 동안 소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코로 짧게 숨을 내뿜었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건넛마을 방앗간 집 딸이냐, 아니면 냇가 건너 이씨네 하녀냐."

소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이라는 것을 그는 서른다섯 해 하인 노릇에서 배웠다.

"허허, 이놈 봐라. 빗자루만 쥐던 놈이 벌써 그런 걸 알아."

노인은 찻잔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한결 풀린 얼굴이었다. 노인의 머릿속에서 문지기의 침묵과 마부의 땅콩과 달라진 걸음이 한 줄로 꿰어진 모양이었다. 열다섯 사내놈이 밤마다 담을 넘어 계집아이를 만나러 다니느라 사람들에게 입막음 값을 치르고,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다리가 단단해졌다. 늙은 집사가 보기에는 그보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없었을 것이다.

"내 너한테 하나만 일러 두마. 옛말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했다. 그런데 그건 나무 이야기다. 사람은 열 번 찍으면 도끼를 뺏는다."

"……명심하겠습니다."

"또 명심이냐. 그리고 일은 하거라. 밤에 놀다 와서 낮에 마당을 어깨로 쓸면 내 그 계집아이네 집에 찾아갈 게다."

"예, 집사 어른."

"가 봐라."

소한은 절을 하고 물러났다. 방문을 닫고 행랑채 마루를 걸어 나오는 동안, 그는 등에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건넛마을 방앗간 집 딸의 얼굴은 알지도 못하였다. 이씨네 하녀는 전생에서 마흔이 넘어 시집을 갔고, 그 혼례 날 소한은 진가장의 이름으로 축의를 들고 갔었다.

이번 생에서 그 하녀를 마주치게 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소한은 그것이 조금 걱정되었다.


그날 밤 소한은 평소보다 한 시진 늦게 행랑채를 나섰다. 노인이 잠들었는지 확인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노인의 방에서는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고, 문지기 영감은 대문 옆에서 소한이 지나가자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뒷산 길은 달이 이지러져 어두웠다. 소한은 솔뿌리를 피해 가며 익숙한 길을 올랐다. 스무 날 동안 오르내린 길이라 이제는 눈을 감고도 오를 수 있었고, 다리도 처음처럼 후들거리지 않았다.

바위터 어귀에 이르렀을 때, 소한은 걸음을 멈추었다.

바위 아래 구석, 그가 밤마다 마보로 서던 자리가 깨끗하였다. 스무 날 동안 그 자리의 흙은 그의 발에 짓눌려 두 개의 얕은 웅덩이처럼 패어 있었고, 그 둘레에는 엉덩방아를 찧은 자국과 쓰러져 뒹군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대충 흙을 덮어 두기는 하였으나 패인 자리까지 메우지는 못하였다. 주인이 아침마다 오르는 길목에서 조금 비켜난 구석이라 아직 들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자리가 지금은 평평하게 메워져 있었다. 패인 흙은 고르게 채워졌고, 그 위로 비질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목만 까딱하는 짧은 비질이 지나간 자리였으니, 결이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곧았다.

소한은 그 결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메워진 흙을 밟지 않으려고 한 뼘 옆으로 비켜서서, 두 발을 벌리고 무릎을 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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