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아가씨의 거래
유청송이 떠나고 이레가 지난 밤이었다. 소한은 여느 때처럼 바위 아래 구석에 서서 마보를 잡고 있었다. 아랫배의 온기는 콩알에서 대추씨만큼 자라 있었고, 숨을 따라 오르내리는 것도 한결 수월해져 있었다. 검결의 둘째 구절, 뜻을 검보다 앞세우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렴풋이 손에 잡힐 듯하여, 소한은 그 어렴풋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솔숲 쪽에서 마른 가지 하나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소한은 눈을 뜨기도 전에 몸부터 저절로 낮아졌다. 산짐승이라면 너구리나 오소리였을 것이고, 사람이라면 이 시각에 뒷산에 오를 사람은 없었다. 왕 노인이라면 소리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바위터 흙을 메우러 왔던 밤에도 발소리 하나 남기지 않았다.
솔숲 그늘에서 무언가가 꿈틀하더니, 작은 그림자 하나가 굴러 나왔는데, 정확히는 솔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며 굴러 나온 것이었다. 그림자는 바위터 어귀 흙바닥에 엎어진 채로 잠시 움직이지 않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고, 달빛 아래 드러난 그 얼굴은 다름 아닌 진서연이었다.
머리는 대충 묶었고, 치마 대신 소복이 입다 버린 하인 바지를 걷어 입었으며, 손에는 유청송이 준 옥 노리개 대신 부엌에서 들고 나온 듯한 부지깽이를 쥐고 있었다. 무릎에 흙이 잔뜩 묻었고, 한쪽 뺨에는 솔잎이 붙어 있었다. 진가장의 외동딸이 하인 바지를 입고 부지깽이를 든 채 한밤중의 산길을 기어오른 꼴이었으니, 누가 보았다면 도깨비에 홀린 줄 알았을 것이다.
마보 자세로 굳은 하인과 흙바닥에 엎어진 아가씨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아가씨 쪽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소한은 무릎을 펴고 허리를 세웠으나,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주인은 서연이 밤에 바위터에 오를까 걱정이라며 보거든 일러 달라고 하셨다. 그런데 정작 바위터에서 먼저 들킨 것은 그 일러 바쳐야 할 하인 놈이었다.
"아가씨야말로 이 시각에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내가 먼저 물었잖아."
"쇤네는…… 바람을 쐬러 왔습니다."
"바람을 쐬는데 왜 다리를 이렇게 벌리고 있어? 쭈그리고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니고."
서연이 부지깽이로 소한의 다리를 가리켰다. 소한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거짓말을 할 때면 존대가 지나쳐지는 버릇이 입끝까지 올라왔으나, 이 아가씨 앞에서 그 버릇을 부렸다가는 더 의심만 살 것이었다.
서연이 일어나 무릎의 흙을 털더니, 소한의 자세를 흉내 내어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굽혀 보았다가 세 호흡을 넘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이거 뭐야, 왜 이렇게 힘들어."
"그러니 아가씨께서는 하실 것이 못 됩니다."
"너는 하잖아."
"쇤네는 하인이라 다리가 튼튼합니다."
"거짓말. 너 작년까지 물동이 두 개 들면 비틀거렸잖아."
소한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 아가씨는 버선을 잊고 고름을 거꾸로 매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의 다리가 언제부터 튼튼해졌는지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연은 바위에 걸터앉아 부지깽이를 무릎 위에 가로놓고 다리를 흔들었고, 소한은 그 앞에 선 채로 이 아가씨를 어떻게 하면 무사히 산 아래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를 궁리하였다.
"아버지가 하는 거 몰래 따라 하는 거지?"
정곡이었으나 소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이라는 것을 이 아가씨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럴 줄 알았어. 요즘 너 걸음이 아버지랑 똑같아졌어. 발을 이렇게 꾹꾹 누르면서 걷잖아. 처음엔 흉내 내는 줄 알았는데."
서연이 바위 위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달빛에 그 눈이 반짝였는데, 그것은 장터에서 좋은 물건을 싼값에 손에 넣은 사람의 눈과 꼭 닮아 있었다.
"아버지한테 이르면, 너 어떻게 될까?"
소한은 그 질문의 무게를 알았다. 주인의 검결을 훔쳐 배운 하인은 매를 맞고 쫓겨날 것이고, 쫓겨나면 세 해 뒤의 불 앞에 설 수 없었다.
"……아가씨께서는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이를지 말지는 내가 정할 거야. 근데 조건이 있어."
서연은 소한의 코앞에 손가락을 하나 펴 보였다.
"첫째. 내가 시키는 심부름 다 해."
두 번째 손가락이 펴졌다. 손톱 밑에 흙이 끼어 있었다.
"둘째. 아버지가 나 바위터 왔다는 거 알면 안 돼. 너도 이르지 마."
소한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주인께 이르라는 분부를 받은 하인과 그 하인의 덜미를 붙잡은 아가씨가 이 산꼭대기에서 서로의 목줄을 하나씩 쥐고 마주 선 셈이었다. 주인이 아시면 둘 다 경을 칠 것이니, 둘 다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셋째."
"아직 남았습니까."
"셋째, 나도 가르쳐 줘."
"그건 아니 됩니다."
소한의 대답이 생각보다 빨리 튀어나왔고, 서연의 눈썹이 그만큼 빠르게 치켜 올라갔다.
"왜?"
"쇤네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보신 그대로입니다. 다리만 벌리고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럼 다리 벌리고 서 있는 거라도 가르쳐 줘."
"그것은 아가씨께서 방금 하셨다가 엉덩방아를 찧으셨습니다."
서연이 부지깽이를 들어 올리자 소한은 반 치쯤 물러섰으나, 서연은 그것을 휘두르지 않고 도로 무릎 위에 내려놓은 채 한참 소한을 노려보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좋아. 셋째는 나중에. 대신 첫째부터 해."
"무슨 심부름이옵니까."
"내일 노삼이 장에 가지? 북문 밖 시장에 탕후루 파는 집이 있어. 산사 열매에 설탕 바른 거. 어머니가 단 거 먹으면 이 썩는다고 못 사 먹게 하셔. 그거 다섯 개."
"다섯 개나 말입니까."
"하나는 너 줄게."
소한은 대답 대신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북문 밖 시장이라면 흑풍방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었다. 장씨 아주머니의 부뚜막에서 들은 문 닫은 약재상들도 그 언저리에 있었고, 유청송이 대청에서 꺼낸 독을 다루는 새 부방주의 이야기도 그곳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하인이 이유 없이 북문 밖을 기웃거리면 의심을 산다. 그러나 아가씨의 탕후루 심부름을 하러 간 하인이라면, 시장 바닥을 반나절 헤매고 다녀도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을 것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진짜? 웬일이야, 순순히."
"아가씨의 분부를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서연은 미심쩍은 얼굴로 소한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만족한 듯 바위에서 뛰어내렸고, 그 바람에 또 휘청이는 것을 소한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소매를 붙잡자 서연은 그 소매를 홱 빼냈다.
"잡지 마. 혼자 갈 수 있어."
"산길이 어둡습니다. 쇤네가 앞서겠습니다."
"……그럼 앞에서 걸어. 뒤에서 걷지 말고. 뒤에서 걸으면 무서워."
소한은 아무 말 없이 앞장섰다. 솔숲을 지나는 동안 등 뒤에서 서연의 발소리가 바짝 붙어 따라왔고, 솔뿌리에 걸릴 때마다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소한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반 박자씩 늦추었다.
산 아래 담장의 개구멍 앞에서 서연이 걸음을 멈추었다. 진가장의 외동딸이 개구멍으로 드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소한은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서로의 목줄을 쥔 사이에는 그런 예의가 필요하였다.
서연이 개구멍에 몸을 반쯤 들이밀다가, 무언가 잊은 것이 생각났는지 고개만 뒤로 돌렸다.
"못생긴 한아."
"예."
"너 그거, 나중에 진짜 가르쳐 줘야 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연은 개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소한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개구멍 앞의 흙에 남은 작은 발자국 두 개를 발끝으로 쓸어 지웠다.
이튿날 새벽, 탕후루 다섯 개를 사 오라는 분부를 품에 넣은 하인을 태우고, 노삼의 수레는 북문으로 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