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계산
봉투는 책상 위에 있었다.
밤새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둔 채로 잤다가, 아침에 출근해서 꺼내 놓았다. 가방에 넣으면 받은 게 되는 것 같았고, 쓰레기통에 넣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책상 한가운데 그냥 뒀다. 흰 봉투. 입구가 살짝 벌어져서 신사임당이 반쯤 보이는 봉투.
나는 그 앞에 앉아 커피믹스를 탔다. 한 잔째였다.
어제 갭돌이 앞에서 돌려줬어야 했다. 그게 맞았다. 안 돌려준 이유를 대자면 대충 세 개쯤 됐다. 첫째, 거기서 거절하면 갭돌이가 나를 경계할 거다. 둘째, 경계하면 정보를 못 캔다. 셋째는 김 사장의 마침표 두 개였다.
첫째와 둘째는 핑계였고, 셋째가 진짜였다. 나는 그걸 알았다. 알면서도 봉투를 치우지도, 돌려주러 가지도 않은 채 커피를 마셨다.
10시에 307호 새댁이 왔다.
박 여사가 연락처를 넘겨준 지 하루 만이었다. 문에 달린 종이 울리자 나는 반사적으로 봉투를 집어 서류철 밑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뭘 했는지 깨닫고 잠깐 손을 멈췄다.
"안녕하세요. 박 사장님이 여기 가 보라고 하셔서요. 한소영입니다."
신발, 손, 눈.
굽 낮은 회색 단화. 굽 바깥쪽만 닳았다. 하루에 많이 걷는 사람이다. 손에는 클리어 파일 하나. 파일 안에 서류가 색인 스티커까지 붙어서 정리돼 있었다. 눈은 빨갛지 않았다. 대신 밑이 거뭇했다. 울 만큼 울고 나서 이제 뭘 해야 할지 계산하기 시작한 사람의 눈이었다.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바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한소영은 앉자마자 클리어 파일을 열었다. 첫 장은 전세 계약서 사본, 둘째 장은 국가 공인 감정서 사본, 셋째 장은 보증금 이체 내역, 넷째 장은 임대인과 주고받은 문자 캡처였다. 다섯째 장에는 손글씨로 날짜별 사건 정리가 적혀 있었다.
"…혹시 경리 하세요?"
"작은 물류 회사에서 회계요. 어떻게 아셨어요?"
"색인 스티커요."
한소영이 피식 웃었다. 오늘 처음 웃는 것 같았다.
계약서를 넘겼다. 신림 4-11 던전, 지하형, 표시 등급 C. 보증금 6,000만 원, 2년. 임대인 차갑돈. 같은 막도장. 감정서의 감정사 직인도 철호 것과 같은 이름이었다. 허위정.
"남편분이랑 같이 모으신 거라고요."
"결혼 준비하면서 3년 모았어요. 신혼집 전세 대신 던전 전세를 먼저 잡은 건 제 생각이었어요. 남편은 반대했고요. C급이면 매달 자원 팔아서 이자 내고도 남는다고, 2년 뒤에 보증금 돌려받아서 집 구하자고 제가 우겼어요."
한소영은 그 말을 할 때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남 얘기를 하듯이 했다. 그래서 더 잘 들렸다.
"그러니까 이건 제가 책임져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왔어요."
나는 그녀에게 철호한테 한 말을 그대로 했다. 장담은 못 한다. 이런 놈들은 돈을 이미 다른 데 박아 놨을 거다. 소송은 이겨도 받을 돈이 없으면 판결문은 종이다.
한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중간에 한 번도 끊지 않았다. 다 듣고 나서 물었다.
"사장님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갭돌이, 아니 차갑돈 씨가 다른 데 박아 둔 돈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야죠. 그 사람이 가진 던전 중에 진짜 값어치가 있는 게 있으면, 거기에 가압류를 걸 수 있어요."
"그건 변호사가 하는 일 아니에요?"
"가압류는 변호사가 하죠. 근데 어느 던전이 진짜 값어치가 있는지는 변호사도 몰라요. 다들 감정서만 보는데, 그 감정서가 틀렸는지 다시 확인할 방법이 없거든요."
"사장님은 아세요?"
나는 대답 대신 커피를 마셨다. 두 잔째였다. 한소영이 그 침묵을 2초쯤 지켜보더니 클리어 파일을 덮었다.
"수수료는요?"
"돌려받으면 10퍼센트. 못 받으면 0원."
"6,000이면 600이네요."
"네."
"7퍼센트로 해 주세요."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한소영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나를 보고 있었다.
"전세 사기 피해자 법률 지원 단체에 알아봤는데요, 거기 연계된 중개사분들은 성공보수를 5퍼센트에서 7퍼센트 받으신대요. 사장님은 그분들보다 뭘 더 해 주실 수 있어요?"
할 말이 있었다. 그 단체 중개사들은 감정서가 가짜인지 못 알아본다. 나는 알아본다. 그런데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눈에 매물 정보창이 보인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클리어 파일을 들고 나갈 거다.
"…8퍼센트요."
"7이요."
"새댁, 아니 소영 씨. 저도 이번 달 월세가 밀려서요."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손님 앞에서 월세 얘기라니. 한소영이 잠깐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7.5요. 그 이상은 안 돼요. 저도 남편한테 설명해야 돼서요."
"7.5요."
우리는 악수를 했다. 6,000의 7.5퍼센트, 450만 원짜리 악수였다. 철호 거 800하고 합치면 1,250.
머리가 또 계산을 먼저 했다.
한소영이 돌아가기 전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사장님, 혹시 그 사람 만나 보셨어요? 차갑돈 씨요."
서류철 밑의 봉투가 생각났다.
"…아직이요. 연락은 해 봤는데."
거짓말이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십 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손님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는 못 한다. 이 매물 금방 나가요, 이 가격 다시 없어요. 그런 건 이 바닥의 인사였다. 그런데 이건 인사가 아니었다.
한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종이 울렸다.
나는 서류철을 들어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한참 그걸 보다가, 아무 데도 넣지 않고 다시 책상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스물네 살 때, 나도 분양 사무실 앞에서 클리어 파일을 들고 서 있었다. 분양 계약서, 입금 내역, 대출 서류. 색인 스티커는 안 붙였다. 그때 내 파일을 받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생각은 거기서 접었다. 봉투를 돌려주면 갭돌이는 나를 경계하고, 정보가 막히고, 철호도 한소영도 못 돌려받는다. 그러면 1,250도 없다. 아침에 한 계산을 순서만 바꿔서 다시 한 셈이었고, 맨 앞자리에는 여전히 김 사장 마침표가 있었다.
나는 봉투를 서류철 밑에 도로 밀어 넣고 열쇠를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점심은 걸렀다. 4-11은 한소영이 맡기고 간 열쇠로 열었다. 빌라 지하 주차장 맨 안쪽, 원래는 자전거 보관대가 있던 자리였다. 바닥 구멍 둘레에 누가 노란 테이프로 사각형을 그려 놓았는데, 그 안쪽 시멘트가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었다.
구멍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상가 볼 때처럼, 입지와 구조와 하자를 보는 눈으로.
【매물】 신림 4-11 던전 (지하형)
표시 등급: C │ 실제 등급: F
매장 자원: 슬라임 젤 (극소량)
하자: 등급 감정서 위조 이력 1회 / 감정사 동일(허위정)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예상이 맞았는데도 기분이 별로였다. 6,000만 원짜리 구멍에서 나오는 건 슬라임 젤 극소량이었다. 한 달 내내 캐도 한소영 회사 월급 한 달 치가 안 나올 거다.
나는 구멍 둘레의 노란 테이프를 봤다. 한소영이 붙였을 거다. 아마 처음 이 던전에 들어온 날, 내 던전이라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라고. 색인 스티커를 붙이는 사람은 테이프도 반듯하게 붙인다. 모서리가 정확히 직각이었다.
갭돌이 매물이 이걸로 세 개째 F였다. 철호의 7-2, 봉천 2-8, 그리고 4-11. 감정사 이름은 셋 다 허위정이었다. 한 사람이 C 도장을 세 번 찍었는데, 세 번 다 F였다.
나는 휴대폰으로 노란 테이프 안쪽을 한 장 찍고, 감정서 사본의 허위정 직인 옆에 볼펜으로 작게 3이라고 적었다.
오후 3시, 김 사장이 직접 올라왔다.
문자 대신 몸이 직접 온 건 처음이었다. 예순 넘은 양반이 2층 계단을 올라오느라 숨이 조금 찼다. 등산 조끼에 등산화. 이 동네 건물주들은 다 등산복을 입는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봉 사장님."
"아이고, 사장님. 올라오시지 않아도 되는데. 커피 드릴까요?"
"됐어요."
김 사장은 앉지 않았다.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봤다. 벽에 걸린 중개사 자격증과 낡은 소파와 물때 낀 정수기를, 이 사무실을 카페로 바꾸면 뭘 버려야 할지 세는 눈으로.
"내가 봉 사장님을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닌 거 알죠."
"알죠."
"우리 아들이 이 사무실 쓰고 싶다고 해서. 카페 한다고. 요즘 애들은 카페를 해요, 망할 줄 알면서."
"…그렇죠."
"금요일까지요. 360. 다는 아니어도 반은 줘요. 반도 안 되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김 사장은 그 말만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등산화 소리가 한 칸씩 멀어졌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화요일이었다. 금요일까지 사흘, 반이면 180.
책상 위에 봉투가 있었다. 50만 원.
180에서 50을 빼면 130이었다.
나는 커피믹스를 하나 더 뜯었다. 세 잔째였다. 물을 붓고 젓는 동안 휴대폰이 진동했다. 문자였다. 마침표는 하나도 없었고, 물결이 두 개 있었다.
사장님~ 손님 언제쯤 보내 주세요?? 이번 주에 4-11 근처 매물 하나 더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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