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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손님

금요일 오전 11시, 나는 2층 계단을 내려가 1층 김 사장네 관리실 문을 두드렸다.

봉투째 줄 수는 없었다. 봉투에서 신사임당 열 장을 꺼내 내 지갑에 넣었다가, 은행 ATM에서 카드론 130만 원을 뽑아 같이 묶었다. 카드론 금리는 연 17.9퍼센트였다. 상가 중개 십 년 하면서 손님들한테 카드론만은 쓰지 말라고 수십 번 말했다.

180만 원을 받은 김 사장은 돈을 한 장씩 세지 않았다. 대신 손으로 두께를 한 번 가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네 건물주들은 돈을 세지 않는다. 두께로 안다.

"나머지는 다음 달까지."

"네."

"봉 사장님, 무리한 거 아니죠?"

"무리 안 했어요."

김 사장은 나를 잠깐 보더니 관리실 문을 닫았다. 나는 계단을 다시 올라오면서 재킷 안주머니를 만져 봤다. 빈 봉투가 들어 있었다.

이제 돌려줄 수 없었다. 돌려주려면 50만 원을 어디서 다시 구해야 했고, 그 50만 원은 이미 김 사장 금고 안에 있었다. 받아 둔 돈이 써 버린 돈이 된 거였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와서 빈 봉투를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그냥 책상 위 서류철 사이에 끼워 두었다. 버리면 증거가 없어진다. 무슨 증거인지는 나도 몰랐다.

오후에는 철호가 왔다. 손에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바나나우유 두 개와 삼각김밥 네 개.

"사장님, 점심 안 드셨죠? 박 사장님이 사장님 요즘 밥 거른다고 하셔서요."

"…철호 씨, 그 돈으로 이자나 내요."

"이건 제 돈 아니에요. 어제 짐꾼 알바 하고 받은 거예요. 일당 8만 원이요."

그게 철호 돈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바나나우유를 받아 들고 빨대를 꽂았다. 커피믹스만 마시던 위장에 우유가 들어가니 속이 이상했다.

철호는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 헌터 커뮤니티 게시판이 떠 있었다. 제목은 '전세 던전 사기 당했습니다. 차갑돈이라는 사람 아시는 분'. 조회수 3,200, 댓글 마흔 개.

"제가 어젯밤에 올렸어요. 저 말고도 당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근데 진짜 있었어요! 댓글에 봉천동에서 당했다는 분도 있고, 사당동도 있고요. 다 같이 모이면 힘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나는 빨대를 문 채로 댓글을 내려 봤다. 피해자들의 댓글 사이사이에 짧은 댓글이 몇 개 섞여 있었다. 작성자 아이디는 제각각이었는데, 말투가 비슷했다. '그 사람 원래 연락 잘 되던데요?' '감정서 있으면 사기 아닌 듯.' '글쓴이 계약서 제대로 읽었음?'

피해자 글에 이런 댓글이 붙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다만 이 댓글들은 글이 올라오고 정확히 20분 뒤에 한꺼번에 달려 있었다.

"철호 씨, 이 글 지워요."

"네? 왜요? 이제 막 사람들이 모이는데…."

"보는 사람이 피해자만이 아니라서요."

철호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화면을 다시 보고, 아이디가 제각각인 그 댓글들을 한참 봤다. 얼굴이 조금씩 하얘졌다.

"…갭돌이가 봤을까요?"

"모르죠. 근데 봤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싸요."

철호는 그 자리에서 글을 지웠다. 지우고 나서 휴대폰을 무릎 위에 엎어 놓고 한참 가만히 있었다. 나는 삼각김밥 하나를 까서 철호 앞에 놓았다. 참치마요였다.

철호가 돌아가고 나서 휴대폰을 열었다. 갭돌이의 문자는 이번 주 내내 하루에 세 번씩 와 있었다.

사장님~ 손님 언제 보내세요??
사장님 4-11 옆에 C급 하나 더 나왔어요 이거 진짜 금방 나가요~
사장님?? 바쁘세요??

물결과 물음표의 개수가 매번 늘었다. 손님을 못 데려오면 봉투값을 못 한 셈이었다. 갭돌이 같은 사람이 봉투를 공짜로 주지는 않는다. 50만 원어치 일을 안 하면 그 50만 원은 나중에 다른 걸로 돌아온다. 대개는 협박으로.

그래서 손님을 만들었다.

"사장님, 손님이 계속 망설이세요. 결혼 앞둔 분인데 감정서를 원본으로 보고 싶다고요. 사본 말고. 요즘 감정서 위조 뉴스가 많아서."

전화 너머로 갭돌이가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다 웃음이 터졌다.

"아이, 그런 손님이 제일 잘 사요. 의심 많은 사람이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거든요. 원본 보여 드릴게요. 오늘 저녁에 봉천동 그 노래방 자리에서 봬요."


봉천 2-8 던전, 망한 노래방. 형광 별 스티커는 그대로였다.

갭돌이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 봉투를 흔들었다. 오늘은 체크무늬 재킷 대신 남색 니트였다. 금목걸이는 그대로였다.

"원본이요. 보세요, 보세요. 국가 공인 직인."

감정서 원본은 사본보다 종이가 두꺼웠고, 직인이 붉은 인주로 도톰하게 찍혀 있었다. 감정사는 허위정, 등급은 C, 날짜는 일곱 달 전이었다.

"이 감정사님 유명하세요?"

"유명할 필요가 없어요. 국가 공인이면 돼요. 사장님, 은행이 감정서를 믿고 대출해 주는 줄 아세요?"

"아니에요?"

"은행은 보증보험을 믿어요. 공인 감정서가 있으면 보증보험 회사가 보증서를 끊어 주고, 보증서가 있으면 은행은 대출을 내줘요. 나중에 터져도 은행은 보험사한테 받으면 되니까 손해가 없어요. 보험사는 공인 감정서대로 했으니까 절차상 문제가 없고요."

"그럼 감정사는요?"

"감정사는 '감정하던 날엔 C급이었다' 하면 끝이에요. 던전은 몇 달이면 상태가 변하잖아요. 그걸 누가 증명해요. 그러니까 아무도 다시 안 봐요. 다시 볼 이유가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갭돌이는 신이 나서 떠들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아무한테나 할 수 없는 자랑이라 그런지, 같은 편이라고 믿는 사람 앞에서 갭돌이는 입이 가벼웠다. 봉투 50만 원이 나를 그 같은 편으로 만들어 준 셈이었다.

"근데 사장님은 던전을 몇 개나 갖고 계세요? 저 같은 사람은 하나 사기도 벅찬데."

"아이고, 제 돈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갭돌이가 손을 내저었다.

"위에서 돈 대 주시는 분이 있어요. 저는 그냥 굴리는 사람이고요. 사장님도 나중에 크게 하고 싶으시면 소개해 드릴게요. 그분은 신림 같은 데는 관심 없으세요. 큰 데만 하셔."

"큰 데요?"

"강남이요. 나중엔 다 강남으로 가요."

나는 웃으면서 감정서를 넘겼다. 위에서 돈 대 주는 사람, 그리고 강남.

"근데 사장님."

나는 일부러 조금 불안한 얼굴을 했다. 어수룩한 동네 중개사의 얼굴. 이 얼굴은 십 년 동안 연습했다.

"제가 손님을 데려왔다가… 혹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요. 세입자가 보증금 돌려 달라고 하면요. 저도 중개사라 책임이 좀…."

갭돌이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니트에서 향수 냄새가 났다.

"사장님, 걱정 마세요. 그럴 땐 넘기면 돼요."

"넘겨요?"

"명의요. 문제 생길 것 같은 던전은 미리 다른 사람 앞으로 넘겨 놔요. 매매로. 그럼 세입자는 새 주인한테 보증금 달라고 해야 되잖아요. 근데 그 새 주인이 신용불량자예요. 재산이 하나도 없어. 그럼 끝이에요. 받을 데가 없으니까."

"…그 새 주인은 누가 하는데요?"

"그런 사람 많아요. 50만 원 주면 도장 찍어 줘요."

갭돌이가 씩 웃었다. 순한 얼굴이었다. 50만 원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순간, 서류철 사이에 끼워 둔 빈 봉투가 생각났다.

"제가 가진 것 중에도 벌써 두 개는 넘겼어요. 이번에 철호인가 하는 애 거, 그 7-2도 다음 주에 넘길 거고요. 그 애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더라고요. 지웠던데, 이미 다 봤죠."

나는 웃었다. 웃는 얼굴로 감정서를 봉투에 도로 넣어 건넸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계약 테이블에서 십 년 동안 연습한 손이었다.

다음 주.

7-2가 바지 사장 앞으로 넘어가면 철호는 신용불량자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한다. 이겨도 종이다. 한소영의 4-11도 순서만 다를 뿐 결국 같은 길로 갈 거다.

시간이 생각보다 없었다.

노래방 계단을 올라오다가 나는 걸음을 멈췄다.

"사장님, 매물 리스트 같은 거 있으세요? 손님이 4-11 말고 다른 것도 보고 싶어 할 수 있어서요. 비교해 보고 고르게."

갭돌이가 계단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잠깐 재는 눈이었다. 그러다 어깨를 으쓱했다.

"리스트야 있죠. 근데 그건 밖으로 안 돌려요. 사장님만 보시려면 제 사무실로 오세요. 내일 오후. 강남역 쪽 오피스텔이에요."

"내일 오후요."

"사장님, 손님 진짜 데려오시는 거죠?"

"데려가야죠."

나는 계단을 마저 올라왔다. 봉천동 밤거리에 편의점 불빛이 번져 있었다. 편의점에 들어가 커피믹스 한 박스를 샀다. 100개짜리였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다가, 그게 이번 달 카드론을 뽑은 바로 그 카드라는 걸 알았다.

빈 봉투와 카드론 130만 원과 다음 주.

계산은 간단했다. 갭돌이가 7-2를 넘기기 전에, 갭돌이가 가진 것 중에서 진짜 돈이 되는 걸 찾아야 했다. 그게 없으면 나는 50만 원에 손님을 팔아 버린 동네 중개사로 끝난다. 내일 그 리스트 안에 그게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 박스를 뜯었다. 백 개 중 첫 번째를 종이컵에 털어 넣고, 계산대 옆 온수기에서 물을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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