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9-4
신림 9동 산 밑 마을버스 종점에서 내려 십오 분을 걸어 올라가면, 담쟁이가 철문을 반쯤 삼킨 공장 하나가 나온다. 철문 위 간판에는 '대성염색'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성' 자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대염색. 염색 공장답지 않게 거창한 이름이 됐다.
철문은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나는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공장 뒤편, 무너진 블록 담장 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부동산을 십 년 하면 남의 땅에 들어가는 길은 대충 보인다. 자랑할 일은 아니다.
공장 안은 넓었다. 염색 기계들이 녹슨 채 줄지어 서 있었고, 바닥에는 마른 염료가 얼룩덜룩 굳어 있었다. 천장 유리창이 군데군데 깨져서 오후 햇빛이 기둥처럼 내려왔다. 그 햇빛 사이로 먼지가 떠다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공장 맨 안쪽에 있었다. 계단 입구에 노란 테이프가 쳐져 있었고, 손글씨 종이가 붙어 있었다. '던전 — 출입 금지 — 차갑돈.' 갭돌이 글씨였는데, 문자와 달리 물결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테이프를 넘어 계단을 내려갔다.
물소리가 먼저 들렸다.
지하실은 원래 염료 창고였던 것 같았다. 천장이 낮고, 벽은 콘크리트였다. 그리고 바닥이 물이었다. 갭돌이 말대로였다. 계단 마지막 칸에서 발을 내리자 신발이 발목까지 잠겼다. 차가웠다. 생각보다 훨씬.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지하실 한가운데, 물 밑으로 푸른빛이 일렁였다. 던전 입구였다. 물이 그 위를 덮고 있어서 빛이 물결 따라 흔들렸다. 벽에서는 물이 계속 새어 나왔다. 콘크리트 틈마다 가는 물줄기가 흘러내려 바닥의 물에 섞였다.
나는 물속을 걸어 입구 앞까지 갔다. 바지가 무릎까지 젖었다. 이 바지는 내가 가진 정장 바지 두 벌 중 하나였다. 그 생각은 접어 뒀다.
입구 앞에 섰다. 숨을 고르고, 상가 매물 볼 때처럼 봤다. 손님이 의뢰한 매물. 입지, 구조, 하자, 등기.
눈앞이 간질거리더니 글자가 떴다.
【매물】 신림 9-4 던전 (침수형)
표시 등급: F │ 실제 등급: B
매장 자원: 중급 마정석 (광맥, 미발견)
하자: 지하수 유입 — 마정석 광맥 반응
나는 그 네 줄을 오래 봤다.
실제 등급 B.
중급 마정석 광맥.
그리고 하자 칸. 지하수 유입, 마정석 광맥 반응. 물이 새는 이유가 광맥이었다. 광맥이 지하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갭돌이가 1억에 던지려는 이유가, 사실은 이 던전이 1억짜리가 아닌 이유였다.
물속에 선 채로 나는 계산을 했다.
중급 마정석 시세는 개당 300만 원 안팎이다. 광맥이면 몇 개가 나오는지 모른다. 수십 개일 수도 있고 수백 개일 수도 있다. B급 던전 매매가는 신림 일대에서 최소 5억. 광맥까지 확인되면 10억을 불러도 산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
1억.
갭돌이는 이걸 1억에 판다고 했다. 하품하면서.
계단을 올라와 공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젖은 바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햇빛 기둥 하나가 내 무릎 앞에 내려와 있었다.
커피믹스가 마시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지만, 사무실 책상 위에 두고 온 뒤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 던전을 사는 방법을 생각했다.
내 돈으로 사는 건 처음부터 안 됐다. 통장에 남은 건 몇만 원이었고, 갚아야 할 카드론이 130만 원이었다. 1억이 거의 통째로 모자랐다.
대출도 안 됐다. 은행은 F급 던전에 대출을 안 해 준다. 공인 감정서상 F니까. 보증보험도 안 붙는다. 내 눈에 B로 보인다고 은행에 말하면, 은행은 나를 정신과에 보낸다.
투자자를 구하는 길이 남았다. 그런데 이 던전이 B라는 걸 증명해야 투자자가 온다. 증명하려면 재감정을 받아야 하고, 재감정을 받으려면 갭돌이 허락이 있어야 한다. 남의 땅이니까. 갭돌이한테 재감정을 받자고 하면, 갭돌이는 그 순간 왜 이 사람이 물 새는 F급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가격을 올리거나, 아예 안 판다.
어느 길도 나 혼자서는 안 됐다.
햇빛 기둥이 조금씩 옆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걸 보다가 다른 생각을 했다.
철호의 보증금 8,000. 한소영의 6,000. 합쳐서 1억 4,000. 그 돈은 지금 갭돌이한테 있다. 정확히는 갭돌이한테 받아야 할 돈이다. 갭돌이는 그걸 줄 생각이 없다. 줄 돈도 없다. 갭돌이 재산은 전부 깡통이니까.
이것 하나만 빼고.
나는 젖은 무릎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갭돌이한테 받을 돈이 1억 4,000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갭돌이가 1억에 던지고 싶은 던전이 있다. 그 둘을 맞바꾸면.
머릿속에서 계약서가 한 장씩 넘어갔다. 매매 대금과 지급 방법, 그리고 특약.
그리고 그 계약서의 맨 마지막 줄, 매수인 칸에 들어갈 이름이 문제였다. 철호와 한소영. 둘의 이름이 들어가면, 이 던전은 그 둘의 것이 된다. 내 이름은 그 칸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공장 바닥에 앉은 채로 한참 그 줄을 봤다. 머릿속에 그려 놓은 계약서였는데도 그 줄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걸 찾은 건 나다. 내 눈이다. 5년 동안 아무도 못 본 걸 내가 봤다. 철호는 이 던전이 있는 줄도 모른다. 한소영도 모른다. 내가 입을 다물고 다른 길을 찾으면, 언젠가 이 던전은 내 거가 될 수도 있었다. 몇 년이 걸리든.
그 몇 년 동안 7-2는 수요일에 바지 앞으로 넘어간다. 4-11도 언젠가 넘어간다. 철호와 한소영은 신용불량자를 상대로 판결문을 받는다. 종이를.
스물네 살의 나도 판결문을 받았었다. 이긴 판결문이었다. 한 푼도 못 받았다.
햇빛 기둥이 내 무릎에서 벗어났다. 나는 일어섰다. 젖은 바지가 다리에 들러붙었다.
공장을 나와 마을버스 종점까지 내려오니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나는 거기서 커피믹스 한 봉지와 뜨거운 물을 샀다. 가게 할머니가 젖은 바지를 보더니 혀를 찼다.
"저 공장 들어갔다 왔어? 거기 물 차 있는데."
"네. 좀 봤어요."
"뭐 하러 거길 봐. 십 년째 비어 있는 데를."
할머니는 묻지도 않은 얘기를 했다. 동네 구멍가게 할머니들은 원래 그렇다. 박 여사도 그렇고. 대성염색은 십 년 전에 망했다고 했다. 염료값이 오르고 중국 공장에 밀려서. 사장은 공장을 팔려고 했는데 산 밑이라 아무도 안 샀다고. 그러다 작년에 젊은 사람 하나가 와서 땅을 샀는데, 재개발 소문 듣고 산 거라고 동네 사람들이 다 웃었다고 했다.
"재개발이 되긴 뭐가 돼. 저 산을 깎아야 되는데. 그 총각 돈 날렸지."
"그 총각이 지하에 던전 있는 것도 알았을까요?"
"알았겠지. 근데 물바다라며. 동네 애들이 들어갔다가 신발만 버리고 나왔어. 거기서 나오는 건 물컹한 거 몇 마리뿐이래."
나는 커피믹스를 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물바다만 봤고, 물이 왜 차는지는 아무도 안 봤다. 물이 새는 던전은 깡통이라는 게 이 바닥 상식이었으니까.
종이컵을 다 비우고 할머니한테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젖은 바지로 버스 타면 감기 든다고 비닐봉지 두 장을 줬다. 의자에 깔고 앉으라고.
계약서의 매수인 칸에는 내 이름도 들어갈 수 있었다. 철호와 한소영 옆에, 작게. 성공보수 대신으로.
그 정도면 욕심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 둘 중 어느 쪽인지 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휴대폰을 꺼내 철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아침 사무실로 와요. 한소영 씨도 같이.
전송을 누르고 나서 공장 철문 쪽을 돌아봤다. 떨어져 나간 '성' 자 자리에 녹슨 나사 구멍 두 개만 남아 있었다.
대염색.
정류장 의자에 비닐봉지를 깔고 앉았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철호였다. 느낌표가 네 개였다.
넵!!!! 근데 무슨 일이에요?? 저 혹시 또 뭐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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