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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매수인

월요일 오후 세 시, 갭돌이는 우리 사무실 문을 열면서부터 웃고 있었다.

오늘은 체크무늬 재킷에 흰 운동화, 젤 바른 머리에 목에는 그 금목걸이였고,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9-4 등기권리증과 인감도장, 그리고 공인 감정서 원본. 내가 전화로 챙겨 오라고 한 것들이었다.

"사장님! 진짜 그 물바다를 사겠다는 손님이 있어요? 1억 4천에?"

"네. 손님이 공장 땅까지면 그 정도는 줘야 한다고 해서요."

"아이고, 그 손님 땅 볼 줄 모르네. 사장님이 말리셨어야지."

"말렸는데요. 꼭 그 땅이어야 한대요."

갭돌이가 소파에 앉으며 다리를 꼬고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봤다. 낡은 소파, 물때 낀 정수기, 벽에 걸린 자격증. 그 눈이 이 사무실 월세가 얼마쯤일지 재고 있었다. 그리고 나한테 쥐여 준 50만 원이 이 사무실에 얼마나 큰 돈이었을지도.

"손님은 언제 와요?"

"지금 오세요."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철호가 먼저 들어오고 그 뒤로 한소영이 들어왔다. 철호는 내가 사 준 정장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목 단추를 끝까지 잠가서 숨 막혀 보였다. 한소영은 회사 출근복 차림으로 클리어 파일을 들고 있었다.

갭돌이의 웃음이 멈췄다.

꼰 다리가 풀렸다. 갭돌이는 철호를 보고, 한소영을 보고, 마지막으로 나를 봤다. 그 순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순한 게 빠져나갔다.

"…사장님. 이게 무슨."

"손님이요. 매수인 두 분."

"이 사람들 내 세입자잖아요."

"네. 그래서 손님이에요."

갭돌이가 일어서려는 사이 나는 책상 위에 계약서를 펼쳤다. 매매 계약서 세 장, 합의서 한 장. 갭돌이 쪽으로 돌려서.

"사장님, 앉아서 한 장만 읽어 보세요. 읽고 나서 나가셔도 돼요."

갭돌이는 서 있는 채로 계약서 첫 장을 내려다봤다. 매매 대금 1억 4천만 원, 지급 방법은 보증금 반환 채권과 상계.

갭돌이의 눈이 그 줄에서 멈추더니,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시 소파에 앉았다.

나는 그 눈이 계산하는 걸 봤다. 노래방에서, 오피스텔에서 몇 번이나 본 눈이었다. 그 눈은 오늘도 빨랐다.

1억 4천짜리 빚이 있다. 그 빚은 원래 바지 사장한테 넘겨 버릴 빚이다. 그런데 바지 사장한테 넘기려면 50만 원이 들고, 등기소에 가야 하고, 무엇보다 이 둘이 고소를 하면 일이 커진다.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왔고, 봉천동 피해자와 사당동 피해자가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이 둘이 물 새는 F급 땅을 받고 빚을 없던 걸로 해 주겠다고 한다. 1억 1천에 산 땅. 아무도 안 사는 땅. 하품하면서 1억에 내놓은 땅.

갭돌이가 합의서를 집어 읽었다. 매수인은 7-2, 4-11 관련 민·형사상 청구를 하지 않는다.

갭돌이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두 분, 이거 진짜 괜찮으세요? 그 땅 물바다예요. 가 보셨어요?"

갭돌이가 철호와 한소영을 보며 물었다. 진짜로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노래방에서 나한테 봉투를 쥐여 줄 때도 저 목소리였다.

"알아요."

한소영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차가웠다.

"근데 당신한테서 보증금 받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고 사장님이 그러셨어요. 땅이라도 받는 게 낫대요. 종이보다는."

갭돌이가 나를 보길래 나는 십 년 연습한 얼굴로 어수룩하게 웃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사장님 재산이 이 땅밖에 없다고. 다른 건 다 넘기실 거잖아요."

갭돌이의 눈이 아주 잠깐 가늘어졌다. 내가 넘긴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눈이었다. 그러다 금방 풀렸다. 노래방에서 자기 입으로 말한 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내가 지금 피해자들 편에서 물바다를 1억 4천에 떠넘겨 주고 있다는 것도.

갭돌이가 다시 다리를 꼬았다. 피해자들 편에 서서 피해자들한테 깡통을 안기는 바보 중개사를 보는 얼굴로.


갭돌이는 계약서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특약 1항부터 6항까지는 대충 넘기고, 7항에서 잠깐 멈춰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매매 목적물은 계약일 현재 상태대로 인도하며.

갭돌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뭐예요?"

"나중에 깡통인 거 드러나도 손님들이 물러 달라고 못 한다는 거예요. 사장님 보호 조항이요."

"아."

갭돌이가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추후 감정 결과 및 매장 자원이 다르게 확인되더라도, 매도인과 매수인은 계약의 해제, 취소 또는 대금의 증감을 청구할 수 없다.

"좋네요. 이거 좋아요. 사장님 계약서 잘 쓰시네."

"감사합니다."

갭돌이는 거기서 더 읽지 않았다. 매도인과 매수인이라는 단어가 나란히 붙어 있다는 걸, 그게 양쪽으로 읽힌다는 걸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를 보호하는 문장이라고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문장은 갭돌이도 보호했다. 똑같은 무게로.

마지막 장, 중개보수 조항에서 갭돌이가 다시 멈췄다.

"매도인 측 중개보수 중 금 50만 원은 개업공인중개사가 기수령하였으므로 이를 공제한다."

갭돌이가 나를 보더니 이번엔 진짜로, 소리 내서 웃었다.

"사장님, 이거 그 봉투요?"

"네. 받은 건 받은 거니까요. 계약서에 적어 두는 게 깔끔하잖아요."

"아이고, 사장님 진짜 고지식하시네. 그냥 받으시지. 누가 안다고."

"저는 계약서에 안 적힌 돈은 무서워서요."

갭돌이는 고개를 저으며 웃더니 인감도장을 꺼냈고, 매도인 칸에 도장이 한 번, 두 번, 세 번, 간인까지 찍혔다.

철호가 매수인 칸에 다시 이름을 쓰는데 손이 떨려서 '호' 자가 삐뚤어졌고, 한소영은 반듯하게 썼다.

갭돌이가 일어서서 재킷 앞섶을 털고 문으로 가다가 돌아서서, 철호와 한소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게.

"두 분,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그 땅 잘 쓰세요. 물은 좀 퍼내셔야 될 거예요."

문에 달린 종이 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가는 갭돌이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셋이 남은 사무실에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철호가 셔츠 목 단추를 하나 풀었고, 한소영은 계약서를 클리어 파일에 넣고 '9-4'라고 적은 색인 스티커를 붙였다.

나는 오늘 일곱 잔째 커피믹스를 탔다. 물을 붓는 손이 조금 떨렸지만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여기엔 들킬 사람이 없었다.

"사장님."

철호가 물었다.

"이제 저 땅 저희 거예요?"

"등기 이전하면요. 내일 아침 등기소 가요."

"그럼 그 던전도요?"

"네."

철호가 한참 계약서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첫날 이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눈이 빨갰다.

"…근데 사장님, 진짜 B급 맞아요?"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야 대답했다.

"내일 등기소 들렀다가 철물점부터 가요. 장화 세 켤레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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