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쟁반 하나씩
랜턴을 들고 뒤뜰로 돌아갔다.
닭장 앞에 서자 누런 불빛이 철망에 걸려 잘게 부서졌다. 안은 아까 본 그대로였다. 깃털 몇 개, 횃대의 말라붙은 닭똥, 엎어진 양은 모이통.
문을 묶어 둔 철사만 달랐다.
두 바퀴 감겨 있던 게 한 바퀴 반쯤 풀려 있었다. 문이 손가락 두 개 들어갈 만큼 벌어져 있었고, 그 틈 아래 흙바닥에 뭔가 긁힌 자국이 있었다. 랜턴을 바짝 대 봤지만 너무 희미해서 뭔지 알 수 없었다.
'고양이인가.'
시골에는 들고양이가 많다. 빈 닭장에 쥐라도 잡으러 들어왔다가 철사를 건드렸을 수도 있다.
철사를 다시 두 바퀴 감았다.
감으면서 어릴 때 이 닭장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내 손에 모이 바가지를 쥐여 주고 닭장 문을 열었다. 닭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발등을 쪼면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모이를 다 쏟았다. 할아버지는 웃지도 않고 다시 바가지를 채워 줬다.
그 닭들이 다 갔다고 했다.
할아버지 방에 이불을 폈다. 이불에서 할아버지 냄새가 났다. 담배 냄새도 아니고 땀 냄새도 아니고, 그냥 흙이랑 볕이 섞인 냄새.
눈을 감자마자 잠이 왔다.
눈을 뜨니 다섯 시 반이었다.
알람은 안 맞췄다. 몸이 알아서 일어난 거다. 7년 동안 다섯 시 반에 울리던 알람이 이제는 몸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누운 채로 천장을 봤다. 여섯 시 십 분이 되면 단톡방에 현장 배정이 올라오고, 일곱 시까지 집하장 정문에 서 있어야 했다. 오늘은 그 방에 내가 없다.
일어나서 할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이상한 기분인 줄 몰랐다.
'아니, 있지.'
나는 이불을 갰다.
그리고 장갑을 끼려다 말고, 맨손으로 밭에 나갔다.
새벽 밭은 회색이 더 짙다. 이슬이 앉았는데도 흙이 젖은 티가 안 났다. 어제 살려 놓은 쟁반 두 개만 이슬을 머금고 거뭇하게 빛났다.
밭 가장자리에 서서 전체를 훑었다.
고랑은 동서로 길게 나 있다.
바람은 산 쪽에서 내려와 마을 쪽으로 빠진다.
해는 왼쪽에서 뜬다.
서울 현장이었으면 이쯤에서 동선부터 그렸을 거다. 잔류물은 바람을 타니까 바람 위쪽부터 치워야 한다. 2년 차 때 그걸 몰라서 반나절 치운 걸 다시 한 적이 있었다. 그날 최 선배는 내 실수를 핑계로 내 몫 물량까지 자기 이름으로 올렸다.
산 쪽 첫 고랑, 맨 끝에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을 흙에 댔다.
빨아들인다. 손끝에서 방향이 틀어진다. 흙이 받아서 가라앉힌다. 손을 뗀다. 쟁반 하나.
한 뼘 옆으로 옮겨 앉아 다시 댔다.
쟁반 하나.
처음 스무 번쯤은 한 번 할 때마다 손을 들여다봤다.
손끝이 다시 검어지지 않았나, 저리지 않나.
서른 번째쯤부터는 안 봤다.
마흔 번째쯤에서는 숫자 세는 것도 잊었다. 손바닥이 흙에 닿을 때마다 아래로 뭔가 가라앉는 그 느낌만 남았다. 쑥, 하고 내려가서 조용해지는 느낌.
멀리서 산비둘기가 운다.
서울 집하장에서는 트럭 후진 경고음만 들렸는데.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오자 등이 뜨거워진다.
[부숙 — 숙련 5]
창이 떴다 사라졌다.
쳐다보지도 않고 다음 자리로 옮겨 앉았다.
허리가 먼저 아프다.
그다음은 무릎이었다. 쪼그려 앉았다 일어났다를 수백 번 하니까 허벅지가 떨렸다.
서울에서는 서서 일했다. 맨홀에 사다리로 내려가서 벽에 손바닥을 대고, 집하장에서는 쌓인 폐기물 더미에 손을 쑤셔 넣었다. 쪼그려 앉아 땅바닥에 손을 대는 건 처음이다.
그런데 손은 멀쩡하다.
서울에서는 이만큼 빨아들이면 점심 전에 손목부터 저려 왔다. 오후가 되면 손가락이 안 굽혀졌고, 숙소에 가서 찬물에 손을 담그고 한참 앉아 있어야 젓가락을 쥘 수 있었다.
"어이, 총각!"
밭둑 위에서 누가 불렀다.
이장이었다.
경운기 대신 녹슨 자전거를 끌고 서 있었다.
"아침부터 밭에 엎드려 뭐 하나 했더니. 어르신 밭 정리하는 거요?"
"…네, 뭐."
이장이 자전거를 세우고 밭둑을 내려왔다.
그러다 첫 고랑 앞에서 멈춰 섰다.
갈색 띠가 고랑을 따라 열 걸음쯤 이어져 있었다.
이장은 한참 그걸 내려다봤다. 쭈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흙을 찔러 보더니, 한 줌 쥐어 코에 댔다.
"…이게 뭐야."
"거름 좀 넣었어요."
"거름?"
"할아버지가 쌓아 두신 거요."
이장은 흙을 쥔 손을 펴서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손금에 흙이 끼어 있었다.
"이 동네 흙이 손에 붙는 거, 몇 년 만에 보네."
이장은 그 말만 하고 일어섰다.
뭘 더 묻지는 않았다.
자전거를 끌고 밭둑을 올라가다가 한 번 돌아봤다.
"점심은 챙겨 먹어요. 집사람이 또 뭐 싸 놨을 거야."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장이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
스킬 얘기를 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서울이었으면 업체가 먼저 알았을 거고, 그다음엔 원청이, 그다음엔 협회가 알았을 거다. 그러고 나면 그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다. 7년 동안 내 412톤이 그랬던 것처럼.
점심은 이장 부인이 싸 준 밥 남은 걸로 툇마루에서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할아버지 공책을 한 권 펼쳐 놨다.
내가 초등학생 때 것이었다.
봄 대목을 넘기다가 손이 멈췄다.
3월 15일. 바람 셈. 산 쪽 고랑부터 거름 냄. 바람 등지고 해야 거름 안 날림.
웃음이 샜다.
바람 위쪽부터. 내가 2년 차 때 반나절을 날리고 나서야 배운 걸, 할아버지는 이 밭에서 몇십 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
아침에 내가 산 쪽 첫 고랑부터 앉은 건 서울에서 배운 버릇이었다. 그런데 공책 속 할아버지도 같은 자리에서 시작했다.
공책을 덮고 밥을 마저 먹었다.
휴대폰에 문자가 와 있었다.
-구태환 님, 고시원입니다. 다음 달 연장하시나요? 25일까지 말씀 주세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쓰다가 또 지웠다.
고시원 방에 남은 건 캐리어 하나랑 겨울 점퍼 두 벌, 그리고 냉장고 둘째 칸의 무말랭이였다. 7년을 살았는데 짐이 그게 다였다. 일 끝나고 자러만 들어가는 방이었으니까.
'며칠 있다 간다고 했잖아.'
이장한테 그렇게 말해 놓고, 오늘 아침 다섯 시 반부터 밭에 엎드려 있었다.
문자 창을 닫았다.
25일까지는 아직 엿새가 남아 있었다.
오후에는 물을 마시러 마을 안쪽 공동 수돗가까지 걸어갔다. 집 수도는 녹물이 나와서 한참 틀어 놔야 했다.
마을 길은 조용했다.
개도 안 짖었다.
담장 너머로 텃밭 몇 개가 보였는데 다 회색이었다. 한 집 마당에서 할머니 한 분이 의자에 앉아 볕을 쬐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까딱했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수돗가 맞은편에 가게가 하나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윤씨상회'라고 적힌 함석 간판. 페인트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셔터는 내려져 있었고, 셔터 한가운데에 A4 용지 한 장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당분간 쉽니다. 급한 물건은 2층 벨 눌러 주세요.
어릴 때 할아버지 손을 잡고 와서 쭈쭈바를 사 먹던 가게였다. 그때는 셔터가 내려져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2층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나는 수돗물을 받아 마시고 밭으로 돌아갔다.
오후에는 꾀를 내 봤다.
양손을 동시에 흙에 대면 두 배로 빨라지지 않을까. 서울에서도 바쁜 날엔 양손을 다 썼다.
왼손, 오른손을 나란히 짚었다.
[기초 정화]가 양쪽에서 돌았다. 그런데 오른손 쪽만 흙으로 흘러 나가고, 왼손으로 빨려 든 건 손목에서 멈췄다. 익숙한 열기가 왼쪽 팔뚝을 타고 올라온다. 서울에서 7년 동안 매일 느끼던, 몸 안에 고이기 직전의 그 뜨거움.
나는 황급히 왼손을 뗐다.
잠시 뒤 왼손에 고였던 것도 천천히 오른손 쪽으로 넘어가 흙으로 빠져나갔다. 손끝은 멀쩡했다. 그래도 등에 식은땀이 났다.
한 번에 한 손. 흙으로 내려보내는 길은 하나뿐인 모양이다.
'꼼수는 안 통한다 이거지.'
다시 오른손 하나로 쟁반 하나씩 갔다.
해가 서쪽으로 반쯤 기울었을 때, 손바닥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쑥 내려가던 게 옆으로도 번진다.
[부숙 — 숙련 10]
[숙련이 10을 넘었습니다. 한 번에 닿는 넓이가 늘어납니다.]
손을 떼자 쟁반 둘레로 손바닥 반 뼘쯤이 더 갈색이었다.
나는 그 반 뼘을 한참 내려다봤다. 서울에서 7년 동안 [기초 정화] 숙련이 오를 때는 이런 메시지가 뜬 적이 없었다. 숫자만 조용히 하나씩 올라갔을 뿐이다.
넓어진다. 하면 할수록.
해가 기울 때까지 쪼그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땀이 턱 끝에서 떨어져 회색 흙에 동그란 점을 찍었다. 그 자리에 손을 대면 점이 갈색으로 번져 사라졌다.
산 쪽 첫 고랑을 끝내고 두 번째 고랑으로 넘어갔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손바닥 아래 흙이 차가워졌다.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봤다.
산 쪽 첫 고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갈색이었다. 두 번째 고랑도 절반쯤. 회색 밭 한가운데 갈색 띠 하나가 길게 그어져 있었다. 어제 아침까지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상태창."
[기초 정화(F) — 숙련 72]
[부숙(고유) — 숙련 14]
손바닥을 펴 봤다.
손바닥 가운데 흙이 끼어 있었다.
손금 사이사이로.
웃음이 났다.
랜턴을 가지러 집 쪽으로 돌아섰을 때였다.
노을이 뒤뜰 닭장 지붕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 끝, 처마가 살짝 들린 자리에 뭔가가 올라앉아 있었다.
동그랗고, 하얗고, 부스스한 것.
솜뭉치 같다.
바람에 날려 온 비닐 쓰레기인가 싶었는데, 그게 고개를 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