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12시 14분
강태하는 PC방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눈을 감았다. 손등으로 눈두덩을 누르고, 그래도 모자라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다.
"아… 눈부셔."
4월 오전의 햇빛이 순댓국집 간판에 반사되어 정면으로 꽂히고 있었다. 태하는 후드티 모자를 코끝까지 끌어내리고 벽에 등을 붙였다. 사흘 동안 형광등 하나 나간 구석 자리에만 있던 사람의 반응이었다.
"마지막으로 밖에 나온 게 언제예요?"
"…편의점 갈 때요."
"그게 언제였는데요."
"할머니가 컵라면 넣어 주기 시작한 날 전날이요."
도윤은 계산을 그만뒀다. 대신 휴대폰 화면을 봤다. 타이머는 4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림역 4번 출구는 PC방 계단에서 걸어서 3분 거리였다.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이 열한 명 서 있었다. 교복 입은 학생 둘,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 이어폰을 낀 대학생들, 정류장 벤치에서 신문을 펼친 할아버지. 평일 점심 직전의 신림동다운 풍경이었다.
도윤은 그 열한 명을 한 명씩 셌다. 뉴스 단신에는 '부상자 없음'이라고 나왔었다. 그런데 그건 전생의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도윤이 여기 서 있는 것만으로 뭔가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쥐만 한 괴물 세 마리라도, 정류장 벤치 아래서 튀어나오면 할아버지 발목 하나쯤은 물 수 있었다.
"태하 씨, 잠깐 여기 있어요."
"어디 가요?"
"세팅하러요."
도윤은 순댓국집 앞에 세워져 있던 주황색 고깔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가게 사장님이 주차 자리 맡아 두는 용도로 쓰는 거였다. 사장님에게는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 주고 "30분만요"라고 말했다. 사장님은 도윤의 정장을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음은 편의점이었다. A4 용지 두 장과 매직펜, 그리고 투명 테이프 하나를 샀다.
5분 뒤, 신림역 4번 출구 버스 정류장 양옆에 고깔이 하나씩 섰다. 정류장 기둥에는 A4 용지가 붙었다.
촬영 중입니다. 12:00~12:30 정류장 이용을 잠시 자제해 주세요. 바로 옆 임시 정류장을 이용해 주세요. — 제작진
도윤은 정류장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저희 드라마 촬영이 잠깐 있어서요. 버스는 저쪽 20미터 앞에서 세워 달라고 기사님들께 말씀드려 놨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금방 끝나요."
10년 동안 길거리 촬영 현장에서 시민 통제를 하던 목소리였다. 정중하게 미안해하면서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교복 학생 둘이 먼저 움직였다. "무슨 드라마예요?" "아직 비밀이라서요." 그 한마디에 학생들은 신이 나서 20미터 앞으로 걸어갔다. 대학생들이 따라갔다. 장바구니 아주머니는 투덜대며 따라갔다. 벤치의 할아버지만 신문을 접지 않았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내가 여기 30년을 앉았는데, 드라마가 뭐라고."
"어르신, 이따가 저쪽에서 저희가 음료 하나 드릴게요."
할아버지는 신문을 한 번 더 넘기더니, 천천히 일어나 20미터 앞으로 걸어갔다. 음료 때문인지 정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도윤은 고깔 사이에 혼자 섰다. 5분 만에 정류장이 텅 비었다.
"…아저씨 진짜 뭐 하는 사람이에요?"
어느새 다가온 태하가 물었다. 후드티 모자 아래로 눈만 내놓고 있었다.
"매니저요."
"매니저가 이런 것도 해요?"
"이게 매니저가 제일 많이 하는 거예요. 사람 비키게 하는 거."
버스 한 대가 고깔 앞을 지나쳐 20미터 앞, 사람들이 몰려 손을 흔드는 쪽에 섰다.
"기사님들한테 말해 놨다면서요."
"안 했어요."
12시 10분. 도윤과 태하는 정류장 맞은편, 약국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 태하는 휴대폰 타이머를 손에 쥐고 있었고, 도윤은 정류장 바닥을 보고 있었다. 보도블록과 벤치 다리와 하수구 덮개를 번갈아 가며 한 번씩 훑었다.
12시 13분.
"근데 아저씨."
"네."
"안 생기면 진짜 석 달 치 내요?"
"네."
"석 달이면 69만 원인데요."
"계산 빠르네요."
"…그건 그냥 해요. 게임 하면 다 해요."
12시 14분, 타이머가 00:00을 찍으며 태하 손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류장은 그대로였다. 비둘기 한 마리가 벤치 아래를 걸어갔다. 바람에 A4 용지 모서리가 펄럭였다.
12시 14분 20초. 태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윤의 옆얼굴을 봤다. 도윤은 웃고 있었다. 늘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웃음 아래 등줄기로 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뉴스 단신. 오후 12시 14분. 그 '14분'은 신고 접수 시각이었을까, 발생 시각이었을까. 기자가 반올림을 했을까. 아니면 도윤이 고깔을 세운 것 때문에, 사람이 비어서, 뭔가가 달라졌을까.
12시 14분 40초. 정류장 바닥은 여전히 조용했다.
"아저씨, 이거…."
태하가 입을 열었다. 그때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정류장 주변 전깃줄에 앉아 있던 비둘기들까지 한꺼번에, 소리도 없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정류장 벤치 아래 보도블록 하나가 위로 들렸다.
들렸다가, 소리도 없이 가운데부터 쩍 갈라졌다.
갈라진 틈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성수동 뉴스 화면에서 봤던 그 빛이었다. 틈은 손바닥만 했다가, 한 뼘이 됐다가, 맨홀 뚜껑만 해졌다. 그리고 거기서 멈췄다.
12시 15분. 태하는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계단 아래로 굴러간 휴대폰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틈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쥐였는데, 쥐라고 하기엔 고양이만 했고 털이 없었으며 꼬리가 두 개였다. 한 마리, 두 마리, 그리고 세 마리째가 틈 가장자리를 긁으며 올라왔다.
"1분 늦었네."
도윤이 중얼거렸다.
20미터 앞 임시 정류장에서 비명이 터졌다. 교복 학생 하나가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찍고 있었다. 도윤은 그걸 보며 생각했다. 저 영상, 오늘 저녁에 조회수 50만 나온다. 그리고 이틀 뒤면 잊힌다.
쥐 세 마리는 정류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한 마리가 고깔에 코를 박았다가 넘어뜨렸다. 다른 한 마리가 벤치 다리를 갉았다. 할아버지가 30년 앉았다는 벤치였다.
세 번째 쥐가 고개를 들었다. 약국 앞 계단 쪽이었다. 도윤과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
"가만히 있어요."
쥐가 뛰었다. 보도를 가로질러, 차도를 건너, 약국 계단으로. 고양이만 한 몸이 생각보다 빨랐다. 도윤은 일어서려다 말았다. 일어서 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각성도 안 했고, 싸움도 못 했다. 10년 동안 매니저가 현장에서 한 싸움이라고는 사생팬을 막아서는 것 정도였다.
그 대신 태하가 움직였다. 태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약국 앞에 놓인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 원통형 철제 쓰레기통이 옆으로 넘어지며 계단을 굴렀다. 쥐가 쓰레기통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끼익 소리. 쥐가 비틀거리며 방향을 틀었다.
태하는 이미 일어서서 계단 위쪽으로 두 칸 물러나 있었다. 넘어진 쓰레기통이 쥐와 자기 사이에 오도록.
도윤은 그 동선을 봤다. 쓰레기통을 걷어차고 그걸 사이에 둔 채 물러나기까지 1초도 안 걸렸다. 게임에서 수천 번 해 봤을 판단이 마우스 대신 발끝에서 그대로 나왔다.
이거 클립 나온다.
쥐는 쓰레기통 너머의 태하를 잠깐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다른 두 마리가 있는 정류장 쪽으로.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신고한 모양이었다.
경찰차 두 대가 도착했을 때 쥐들은 이미 정류장 주변을 떠나 하수구로 들어간 뒤였다. 경찰들은 갈라진 보도블록 주위에 노란 테이프를 둘렀다. 하나가 도윤의 고깔과 A4 용지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누가 세운 거예요?"
"저희요. 촬영 때문에요."
"무슨 촬영요?"
"드라마요. 근데 촬영 접어야 될 것 같네요."
도윤은 A4 용지를 떼어 접었다. 경찰은 뭔가 더 물어보려다가, 무전기에서 다른 신고가 들어오자 그쪽으로 뛰어갔다. 첫 게이트 출현 사흘째. 경찰도 이게 뭔지 모르는 때였다.
20미터 앞에서 할아버지가 도윤을 불렀다.
"어이, 총각. 음료는?"
도윤은 편의점에 가서 음료 열두 개를 샀다.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 수만큼, 그리고 혹시 몰라 하나 더. 비닐봉지를 들고 임시 정류장으로 가서 한 명씩 나눠 줬다. 교복 학생이 음료를 받으며 물었다.
"아저씨, 이것도 드라마예요?"
"아니요. 이건 진짜예요."
"그럼 왜 우리 비키라고 했어요?"
도윤은 봉지에 하나 남은 음료까지 학생 손에 쥐여 주며 웃었다.
"감이요."
PC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태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기 전에, 태하는 후드티 모자를 벗었다. 햇빛이 정면으로 얼굴에 닿았지만 이번엔 눈을 감지 않았다.
"…아저씨."
"네."
"어떻게 알았어요?"
"계약서 읽으면 알려 준다고 했잖아요."
"그거 말고요. 쓰레기통이요."
도윤은 잠깐 대답을 골랐다.
"그건 제가 안 했어요. 태하 씨가 했지."
"아니, 아저씨가 저 계단에 앉혔잖아요. 쓰레기통 옆에."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약국 앞 계단을 고른 건 쓰레기통 때문이었다. 쥐가 이쪽으로 올 확률은 낮다고 봤지만, 0은 아니었다. 전생에 공연장 동선을 짤 때도 사생팬이 넘어올 확률이 1퍼센트인 펜스 앞에 꼭 스태프 하나를 세워 두었다.
태하는 도윤을 한참 쳐다보더니 계단을 올라갔다. 카운터 앞에서 오말순이 돋보기를 벗은 채 서 있었다. 할머니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화면에는 신림역 정류장 영상이 떠 있었다. 벌써 누가 올린 것이었다.
"…진짜네."
할머니가 말했다. 그러고는 도윤을 봤다. 아까와는 다른 눈이었다. 장사꾼이 물건을 볼 때의 눈.
태하는 구석 자리로 가지 않았다. 카운터 옆 빈 테이블에 털썩 앉더니, 도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약서요."
도윤은 서류 봉투를 열었다. 어젯밤 집에서 직접 쓴 계약서였다. 열네 장. 법은 잘 몰랐다. 인터넷에서 받은 표준계약서 양식에, 전생에 봤던 나쁜 조항들을 기억나는 대로 지우고 반대로 고쳐 쓴 것뿐이었다.
태하는 첫 장을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읽는 건 읽는 거예요. 하는 건 아니고요."
"알아요."
"그리고 이거 다 읽으려면 한 판은 못 해요."
"그것도 알아요."
태하는 고개를 숙이고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아저씨, 제1조부터 오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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