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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신림동 PC방

신림역 4번 출구에서 골목으로 두 번 꺾고, 순댓국집과 휴대폰 대리점 사이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 '말순 PC방'이 있었다. 간판의 네온은 '말' 자의 받침이 나가서 밤이면 '마순 PC방'으로 읽혔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게 더 사장님 같다고들 했다.

도윤은 계단 앞에서 넥타이를 한 번 고쳐 맸다. 오전 11시, 평일, 정장 차림의 남자가 PC방에 들어가는 모습은 어느 각도로 봐도 수상했지만 넥타이를 풀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 점퍼 차림으로 연습생 집 앞에 갔다가 부모님한테 문전박대를 당한 게 세 번이었다.

문을 열자 담배 냄새와 컵라면 냄새, 그리고 기계 열기가 한꺼번에 얼굴로 밀려왔다. 금연 스티커가 문마다 붙어 있었지만 냄새는 스티커를 읽지 않았다.

"어서 온나. 몇 시간?"

카운터 너머에서 굵고 쉰 목소리가 날아왔다. 꽃무늬 몸빼 바지에 형광 분홍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예순은 넘어 보였고, 돋보기안경 너머의 눈이 도윤의 구두부터 넥타이까지를 한 번에 훑었다.

평가가 끝나는 데 2초쯤 걸렸다.

"양복 입고 PC방을 오나? 보험이가, 다단계가?"

"둘 다 아닙니다, 사장님. 사람 좀 찾으러 왔어요."

"빚쟁이면 뒷문으로 나가라. 우리 가게는 손님 안 판다."

"빚 받으러 온 거 아니고요. 오히려 드리러 왔습니다."

할머니의 눈썹이 돋보기 위로 올라갔다. 도윤은 웃었다. 10년 동안 연습생 부모님들과 기획사 사장님들 사이에서 단련된 웃음이었다. 이 할머니가 바로 그 소문의 사장, 오말순이었다. 전생에서 강태하가 '검황'이라는 별명을 달고 세계 1위에 오른 뒤 인터뷰마다 "제 인생의 은인은 PC방 사장님"이라고 말하던 그 사람.

전생의 태하는 그 은인에게 은혜를 갚지 못했다. 은혜를 갚을 만큼 벌었을 때는 제우스 길드가 그의 시간을 전부 가져가고 있었으니까.

"강태하라는 친구, 여기 있죠?"

오말순의 표정이 굳었다. 계산기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그 아는 와?"

"일 시키려고요."

"그 아가 일을 한다꼬?"

오말순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턱으로 가게 맨 안쪽, 창문도 없는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있다. 사흘째 저 자리다. 밥은 내가 컵라면 넣어 주고. 밀린 게 한 달 치, 23만 원이고."

"제가 내겠습니다."

"뭐라꼬?"

도윤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잔고 327만 원짜리 카드였다. 23만 원이면 그중 7퍼센트. 캐스팅 비용으로는 싼 편이었다.

오말순은 카드를 집지 않았다. 대신 도윤을 다시 한번 아래위로 훑었다. 이번엔 5초가 걸렸다.

"총각, 이름이 뭐꼬."

"한도윤입니다. 매니저예요."

"매니저? 연예인 그런 거?"

"비슷한 거요."

오말순은 한참 도윤을 쳐다보더니 카드를 집어 리더기에 긁었다. 영수증이 지익 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할머니는 그걸 찢어서 도윤에게 내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아한테 나쁜 짓 시키면, 내가 찾아간데이."

"그 반대입니다, 사장님."


가게 맨 안쪽 구석 자리는 형광등 하나가 나가 있어서 다른 자리보다 한 톤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모니터 두 대가 번쩍였고, 그 앞에 후드티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키보드 옆에는 빈 컵라면 용기가 세 개, 에너지 드링크 캔이 다섯 개 쌓여 있었다.

모니터 속에서는 캐릭터 하나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화면 오른쪽 위 랭킹 창에 'TAEHA_' 라는 아이디가 1위로 떠 있었다. 서버 전체 1위. 2위와의 점수 차이가 세 배였다.

도윤은 그 화면을 잠깐 구경했다. 검을 휘두르는 캐릭터의 움직임이 묘하게 익숙했다. 정확히는 10년 뒤 S급 헌터 직캠에서 수천 번 돌려 본 움직임이었다. 상대가 막으면 돌아 들어가고, 피하면 끝까지 따라 들어가는 검. 게임 캐릭터였지만,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판단은 그대로였다.

"강태하 씨."

대답이 없었다. 마우스 클릭 소리만 빨라졌다.

"강태하 씨, 저 한도윤이라고 합니다. 잠깐 얘기 좀…."

"아 왜요…."

후드티 속에서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사흘 동안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쉬고 낮은 목소리에 귀찮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일 얘기 좀 하려고요."

"안 해요."

"아직 무슨 일인지 말 안 했는데요."

"무슨 일이든 안 해요."

화면 속 캐릭터가 상대 두 명을 동시에 베어 넘겼다. 'TAEHA_' 옆의 점수가 올라갔다. 태하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도윤은 옆자리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정장 바지가 PC방 의자의 정체 모를 얼룩에 닿는 감촉이 났지만 무시했다. 방송국 계단참과 밴 트렁크에서 10년을 버틴 엉덩이에게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태하 씨, 뉴스 봤어요? 성수동 구멍."

"…봤어요."

"거기서 이상한 거 나오는 거, 그리고 그거 잡은 사람들이 갑자기 힘이 세진 거."

"그것도 봤어요."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더 생길 거예요. 엄청 많이.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제일 센 사람이 태하 씨가 될 거고요."

마우스 소리가 멈췄다.

태하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드티 그늘 아래 얼굴은 생각보다 어리고 말랐는데, 눈 밑만은 생각보다 훨씬 검었다. 그 눈이 도윤을 위아래로 훑었다. 오말순과 똑같은 평가였는데, 결론은 정반대인 것 같았다.

"아저씨 사기꾼이죠."

"아니에요."

"사기꾼들이 다 아니라고 해요."

"그건 맞는 말이네요."

도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하는 다시 모니터로 몸을 돌렸다. 대화 끝, 이라는 뜻이었다.

전생의 강태하는 제우스 길드의 캐스팅 담당이 연봉 10억짜리 계약서를 들고 왔을 때도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아 왜요, 안 해요. 그런 그가 사인을 한 건 3주 뒤였다. 바로 이 PC방 앞 사거리에 게이트가 열렸고, 괴물이 오말순의 가게 유리창을 깼다. 태하는 그날 처음으로 각성했고, 그다음 날 제우스와 계약했다. 할머니 가게를 다시 고쳐 주려고.

3주 뒤면 너무 늦었다.

그날 오말순은 깨진 유리에 다리를 다쳤고, 다시는 똑바로 걷지 못했다.

도윤은 수첩을 꺼냈다. 지난밤 기억나는 것을 전부 적어 둔 수첩이었다. 날짜와 장소와 시각. 10년 동안 헌터 업계 뉴스를 매일 아침 확인하던 매니저의 기억은 생각보다 정확했다. 특히 그 업계 최고 스타의 데뷔 일화 같은 건, 방송에서 하도 많이 우려먹어서 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줄은 오늘 쓸 수 없었다.

"태하 씨, 내기 하나 할래요?"

"안 해요."

"게임 내기 아니에요. 태하 씨가 무조건 이기는 내기."

마우스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듣고는 있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수첩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4월 9일, 오후 12시 14분, 관악구 신림동. 첫 번째 '2차 균열'. 성수동 다음으로 서울에 열린 두 번째 구멍. 신림역 4번 출구 앞 버스 정류장. 규모는 작았고, 나온 괴물도 쥐만 한 것 세 마리였다. 그래서 뉴스에는 단신으로 한 줄 나가고 말았다. 그 한 줄을 도윤이 기억하는 건, 10년 뒤 강태하가 "제가 처음 본 균열은 신림역 버스 정류장이었어요"라고 말한 인터뷰 때문이었다.

도윤은 손목시계를 봤다. 오전 11시 15분.

"한 시간 뒤에요. 12시 14분. 저 앞 신림역 4번 출구 버스 정류장에 구멍이 하나 날 거예요. 성수동 같은 거. 작은 거."

태하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귀찮음보다 어이없음이 더 컸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맞히면 알려 줄게요. 대신 맞히면, 계약서 딱 한 번만 읽어 줘요. 사인은 안 해도 돼요. 읽기만."

"안 맞으면요?"

"안 맞으면 제가 사장님 가게 밀린 거 석 달 치 선결제하고, 다시는 안 올게요."

태하가 도윤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빼서 카운터 쪽을 봤다. 오말순이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 듣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할머니, 이 아저씨 이상한 사람이에요."

"안다. 근데 니 밀린 거 이 총각이 냈다."

"네?"

"한 달 치 다. 23만 원."

태하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꺼내 타이머를 맞췄다. 59분. 그리고 화면을 태하 쪽으로 돌려 키보드 옆에 내려놓았다.

59:00.

58:59.

태하는 그 숫자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게임 창을 최소화했다.

서버 1위 'TAEHA_'의 캐릭터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사흘 만의 일이라고, 카운터에서 오말순이 혼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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