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열일곱 종
펌프장 관리실 책상은 둘이 앉기엔 좁았다. 관리인은 라디오를 끄고 구석 의자로 물러나 앉아, 세 사람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번갈아 봤다. 자기가 지하에 내려갔으면 물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직 못 하는 얼굴이었다.
문재석은 클립보드에서 서류를 한 장씩 빼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늘어놓는 손이 빠르고 정확했다. 매일 하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균열 목격 신고서. 괴생명체 접촉 신고서. 신체 이상 자진 신고서. 이건 각성 의심자용이고요. 현장 출입 경위서. 개인정보 수집 동의서. 장비 반입 확인서. 이건 저 배트 때문이고요."
"배트도 신고해요?"
"둔기니까요."
도윤은 서류 더미를 내려다봤다. 매니저 10년 동안 별의별 서류를 다 써 봤다. 방송 출연 동의서, 초상권 위임장, 공연장 안전 서약서. 그런데 이건 처음 보는 양식들이었다. 양식 맨 위에 '임시'라는 글자가 빨간 도장으로 찍혀 있었다.
"이거 다 언제 생긴 거예요?"
"그저께요."
"그저께요?"
"성수동 이후 정부가 임시전담반을 만들었고, 제가 거기 차출됐고, 이틀 밤을 새서 만들었습니다. 법이 없으니까 양식이라도 있어야죠."
문재석은 그 말을 담담하게 했다. 안경 너머의 눈 밑이 태하만큼 검었다.
태하는 신체 이상 자진 신고서를 썼다. 볼펜을 쥐는 손이 아직 조금 떨렸다. 문재석이 항목을 하나씩 짚어 줬다.
"각성 시점."
"…10시 46분이요."
"각성 계기."
"쥐 때렸어요."
"구체적으로요."
"배트로요. 두 번."
"신체 변화."
태하가 볼펜을 멈췄다. 한참 생각했다.
"세상이 느려졌어요."
문재석의 손도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세상이 느려짐. 그 옆에 괄호를 치고 작게 덧붙였다. 반응속도 향상 추정.
도윤은 현장 출입 경위서를 받았다. 출입 목적 칸에서 볼펜이 멈췄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몰랐다. 쥐 잡으러 왔다고 쓸 수도 없었고, 각성시키러 왔다고 쓸 수도 없었다.
"…산책이요."
"형광 조끼 입고요?"
문재석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볼펜 끝으로 관리인 쪽을 가리켰다.
"저분 말씀이, 구청 점검 나왔다는 분이 11시까지 지하에 내려가지 말라고 했다던데요. 구청에 확인해 보니 오늘 망원 유수지 점검 일정은 없습니다."
관리실이 조용해졌다. 관리인이 구석 의자에서 몸을 움찔했다.
도윤은 볼펜을 내려놨다. 말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는데, 고를 말이 없었다. 10년 동안 현장에서 거짓말은 수없이 했다. 촬영 중입니다, 금방 끝나요,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공무원 앞에서 공무원을 사칭한 걸 들킨 건 처음이었다.
"…구청 사칭한 건 맞아요."
문재석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근데 저분, 다리 안 물리셨잖아요."
"그건 결과고요. 사칭은 사칭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문재석이 안경을 고쳐 썼다.
"여기 균열이 날 거라는 걸, 선생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신림역 때처럼 감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 앞에서 그 말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틀 밤을 새워 양식 열일곱 종을 만든 사람이 '감'이라는 단어를 받아 적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가 좀."
"그럼 이 칸은 비워 두겠습니다."
문재석은 경위서의 한 칸에 빗금을 그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게 적었다. 진술 거부.
서류는 한 시간 반 만에 끝났다. 열일곱 종 중 그 자리에서 다 쓴 건 여덟 종이었다. 나머지 아홉 종은 첨부 서류가 필요했다. 주민등록등본, 건강검진 결과, 장비 구매 영수증, 보호자 동의서.
"보호자요? 저 스물넷인데요."
"각성 의심자는 보호자 또는 책임자를 기재하게 돼 있습니다. 미성년자 기준으로 만든 양식인데, 성인용을 따로 만들 시간이 없었습니다."
태하가 도윤을 봤다. 도윤도 태하를 봤다. 문재석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두 분은 무슨 관계십니까?"
"…매니저요."
"매니저요?"
"계약서 있어요. 열네 장짜리."
도윤이 서류 봉투를 꺼내자 문재석의 눈썹이 올라갔다. 계약서를 받아 들고 첫 장을 넘겼다. 제1조, 오타를 고친 볼펜 자국이 선명했다. 문재석은 그걸 한참 보더니 제5조에서 손을 멈췄다.
"'을'의 활동 시간은 1일 8시간…."
문재석이 그 조항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고는 계약서를 덮고 도윤에게 돌려줬다.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선생님, 이거 직접 쓰셨습니까?"
"네. 인터넷 양식 고쳐서요."
"티 납니다."
문재석은 보호자 또는 책임자 칸에 도윤의 이름을 적게 했다. 그리고 태하의 신체 이상 자진 신고서 맨 아래 등록 번호 칸에 숫자를 적었다.
임시 등록 제14호.
"서울에서 열네 번째 자진 신고 각성자입니다. 앞의 열셋은 전부 성수동 공사장 인부들이고요."
태하가 그 숫자를 내려다봤다. 게임 서버 1위 아이디 옆의 숫자에 익숙한 사람이 처음 받아 보는 종류의 숫자였다.
문재석은 서류를 클립보드에 끼우고 일어섰다. 관리실 문을 나서다가 돌아섰다. 명함 한 장을 도윤에게 내밀었다.
"다음 달에 '각성자 관리에 관한 특별법' 초안이 나옵니다. 공단도 생길 겁니다. 그때가 되면 등록 안 된 각성자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처벌받습니다. 매니저든 뭐든."
"…네."
"그리고 사칭은 오늘 한 번이면 됩니다. 다음엔 제가 못 봐 드립니다."
문재석은 그 말만 하고 펌프장 정문으로 걸어갔다. 회색 점퍼 등이 조금 굽어 있었다. 이틀 밤을 샌 사람의 등이었다.
도윤은 명함을 내려다봤다. 행정안전부 균열대응 임시전담반, 사무관 문재석. 전생에서 이 사람은 헌터관리공단의 과장이 되어, 도윤 같은 무허가 매니저들을 줄줄이 잡아들였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무도 시키지 않은 '헌터 매니지먼트업' 제도 초안을 혼자 써서 국회에 들고 갔다가 퇴짜를 맞았다.
그날 저녁, PC방 2층은 아직 당구장이었다. 당구대 네 대 위에 먼지가 하얗게 앉아 있었고, 벽에는 큐대 걸이와 점수판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오말순이 열쇠로 문을 열어 주며 전기는 들어온다고 했다. 수도는 모르겠다고 했다.
도윤은 당구대 하나에 걸터앉아 수첩을 펼쳤다. 오늘 날짜에 줄을 긋고, 그 밑에 써야 할 것들을 적었다.
첨부 서류 아홉 종. 주민등록등본 두 통, 태하 건강검진, 장비 영수증.
사업자 등록.
거기서 볼펜이 멈췄다. 사업자 등록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매니저 10년 동안 회사 이름이 박힌 명함만 받아 봤지, 회사를 만들어 본 적은 없었다.
"할머니."
계단 쪽에서 내려가려던 오말순이 돌아봤다.
"사업자 등록 어떻게 해요?"
오말순이 한참 도윤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니 그것도 모르고 3천 받았나."
"죄송해요."
"세무서 가면 된다. 날 잡아라, 내랑 같이 가자. 니 혼자 보냈다가는 서류 열일곱 장 들고 올라."
할머니가 계단을 내려갔다. 도윤은 수첩에 '세무서, 할머니랑'이라고 적었다. 그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4월 30일까지 20일.
신림동 사거리 게이트. 전생에서 태하가 처음 각성하고, 할머니가 다친 날. 이번엔 태하가 이미 각성했다. 할머니는 1층 유리 앞에 서지 않기로 했다. 남은 건 그날을 어떻게 쓰느냐였다.
도윤은 휴대폰 두 대 중 하나를 들었다. 연락처를 한참 넘기다가, 이번 생에서는 아직 한 번도 통화한 적 없는 번호를 눌렀다. 전생에서 10년 동안 술자리마다 마주쳤던 케이블 방송 PD의 번호였다. 지금 이 시점의 그 사람은 프로그램 두 개가 연달아 폐지된, 다음 달 계약 연장이 불투명한 PD였다.
신호가 세 번 가고, 피곤한 목소리가 받았다.
"PD님, 안녕하세요. 한도윤이라고 합니다. 처음 연락드려요. …아뇨, 보험 아니에요. 다단계도 아니고요."
"PD님 프로그램 두 개 폐지된 거 알아요. 아, 기사 봤어요. 네, 죄송해요. …아니, 그걸로 놀리려고 전화한 거 아니고요."
"그림 하나 찍으실래요? 20일 뒤 오후 4시, 신림동 사거리에 카메라 한 대만 갖다 놓으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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