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원석
박 PD는 약속 시간보다 40분 늦게 PC방 2층에 올라왔다.
체크무늬 남방에 등산 조끼, 어깨에는 6mm 캠코더가 든 가방을 메고 있었다. 머리는 감은 지 이틀은 된 것 같았고, 손에는 편의점 커피가 들려 있었다. 전생에서 도윤이 10년 동안 술자리마다 본 얼굴보다 열 살 젊었는데, 피곤한 건 똑같았다.
박 PD는 먼지 쌓인 당구대 네 대를 한 바퀴 둘러보고, 당구대 위에 걸터앉은 도윤을 보고, 구석 소파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는 태하를 봤다.
"…여기가 회사예요?"
"아직 회사는 아니고요. 내일 등록하러 가요."
"당구장인데요."
"당구장이었는데요."
박 PD는 한숨을 쉬고 당구대 하나에 캠코더 가방을 내려놨다. 먼지가 풀썩 일었다.
"도윤 씨라고 했죠. 전화로 한 얘기 다시 해 봐요. 20일, 아니 이제 17일 뒤 오후 4시, 신림동 사거리.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요?"
"구멍이요. 성수동 같은 거. 근데 좀 더 큰 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도윤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내밀었다. 신림역 4번 출구 정류장 영상이었다. 교복 학생이 찍어 올린 그 영상은 이제 조회수 230만을 넘겨 있었다. 화면 구석, 약국 앞 계단에 정장 입은 남자와 후드티 입은 청년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이거 저예요. 그리고 쟤예요."
박 PD가 화면을 확대해 정장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들어 도윤을 봤다. 그러고도 못 믿겠는지 한 번 더 화면을 봤다.
"…구멍 나기 전부터 거기 앉아 있었네요."
"네."
"고깔도 세웠고. 이거 그 '드라마 촬영' 사람들이 도윤 씨였어요? 커뮤니티에서 난리 났던데. 무슨 드라마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그게 저예요."
박 PD는 휴대폰을 돌려주고 편의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참 말이 없었다.
"사흘 전 망원 유수지도요?"
"…그것도 아세요?"
"구청 기자실에 아는 사람 있어요. 펌프장 관리인이 형광 조끼 입은 남자 얘기를 했대요. 공무원이 와서 서류 쓰고 갔다고."
도윤은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박 PD는 웃지 않았다.
"도윤 씨, 나 올해 마흔이에요. 프로그램 두 개 날아갔고요. 다음 달 계약 연장 안 되면 나도 끝이에요. 그래서 이 미친 소리 들으러 온 거고. 근데 미친 소리에 카메라 들고 갔다가 아무것도 안 나오면, 나는 진짜로 끝이에요. 장비 대여비도 내 돈이고."
"알아요."
"그러니까 확실하게 물어볼게요."
박 PD가 커피를 내려놨다.
"그림 돼요?"
도윤은 그 질문을 10년 동안 이 사람에게서 수백 번 들었다. 술자리에서, 대기실에서, 녹화장 복도에서. 도윤아, 그림 되냐. 그때마다 도윤은 된다고 했고, 반은 됐고 반은 안 됐다.
이번엔 거짓말이 필요 없었다.
"돼요."
조건은 간단했다. 박 PD가 찍은 영상의 방송권은 박 PD가 갖는다. 대신 태하의 얼굴과 이름은 태하가 동의하는 만큼만 나간다. 그리고 박 PD는 당일 사거리에 내려오지 않고 PC방 2층 창가에서 찍는다.
"현장에서 찍어야 그림이 나오지, 2층에서 뭘 찍어요."
"현장에 있으면 PD님이 다쳐요."
"…그렇게 위험해요?"
"신림역 쥐보다는 커요."
박 PD가 창가로 걸어가 사거리를 내려다봤다. 순댓국집, 휴대폰 대리점, 횡단보도, 신호등. 평일 오후의 평범한 사거리였다. 2층 창가에서 보면 사거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각도는 좋네."
박 PD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소파의 태하를 봤다.
"쟤가 싸워요?"
"네."
"뭘로요?"
도윤은 당구대 밑에서 알루미늄 배트를 꺼냈다. 망원 유수지에서 쓴 그 배트였다. 군데군데 찌그러져 있었다.
박 PD의 얼굴이 굳었다.
"…배트요?"
"네."
"도윤 씨. 나 PD예요. 배트 들고 괴물 때리는 거 찍으면 그게 뭐로 보이는지 알아요? 조폭 영화예요. 동네 양아치 싸움. 뉴스에서 쓸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응원을 안 해요."
도윤은 배트를 내려다봤다. 박 PD 말이 맞았다. 10년 동안 매니저를 하면서 무대 의상 하나 때문에 그룹 이미지가 뒤집히는 걸 수없이 봤다. 그런데 그 생각을 헌터 장비에 할 줄은 몰랐다.
"…그럼 뭘 들려요?"
"검이요. 검 같은 거. 사람들이 보자마자 '아, 저건 싸우는 사람이다' 하는 거."
소파에서 태하가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 게임 화면에서 캐릭터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이면 저 좀 해요."
다음 날 오전, 도윤은 오말순과 함께 구청 옆 세무서에 갔다. 오말순은 세무서 민원실 번호표를 뽑자마자 창구 직원에게 반말을 했고, 창구 직원은 이상하게 그 반말에 고분고분했다. 이 동네에서 28년 장사한 사람의 반말이었다.
"상호는 뭐로 할 낀데?"
서류를 쓰던 오말순이 물었다. 도윤은 볼펜을 멈췄다. 생각해 둔 게 없었다. 전생에서 도윤이 몸담았던 회사들의 이름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다 망한 회사들이었다.
"…원석이요."
"원석?"
"다듬기 전 돌이요. 보석 되기 전."
오말순이 도윤을 한참 쳐다봤다.
"니 돌 팔 끼가?"
"사람이요. 아직 아무도 안 알아보는 사람들."
"그게 돌이지 뭐꼬."
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고 상호 칸에 '원석'이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그 옆 업종 칸에서 손을 멈췄다.
"업종은?"
"…매니지먼트요."
"뭐를 매니지먼트하는데."
"헌터요."
창구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자기 모니터를 한참 들여다봤다. 업종 코드 목록을 위아래로 넘기다가 고개를 저었다.
"헌터 매니지먼트는 코드가 없는데요."
"그럼 뭐로 해요?"
"…연예 매니지먼트로 하시죠. 비슷한 거 아닌가요."
도윤은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비슷한 거 아닌가요. 10년 뒤 이 업종은 연예 매니지먼트보다 열 배 큰 시장이 된다. 지금은 업종 코드조차 없었다.
사업자 등록증이 나왔다. 상호 원석, 대표 한도윤, 업종 연예 매니지먼트. 자본금 3천만 원. 주소 서울 관악구 신림동, 말순 PC방 건물 2층.
오말순이 등록증을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봤다. 그러다 도윤에게 내밀었다.
"잃어버리지 마라. 니 콩팥보다 비싸다."
그날 저녁, 도윤은 신림동 골목 끝 검도장 문을 두드렸다. 관장은 일흔이 다 된 노인이었고, 도장에는 수강생이 셋뿐이었다. 성수동 뉴스 이후로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안 보낸다고 했다.
"목검 하나 살 수 있을까요?"
"뭐 하시게?"
"그림 찍으려고요."
관장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도장 벽에 걸린 목검 가운데 가장 단단한 걸 내줬다. 떡갈나무로 깎은, 손때가 반들반들한 목검이었다. 값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손자가 헌터 영상을 좋아하는데, 혹시 나중에 유명해지면 사인 하나만 받아 달라고 했다.
도윤은 수첩 맨 뒷장 '약속' 칸에 그걸 적었다. 검도장 관장님 손자, 사인 한 장.
PC방에 돌아오자 태하가 2층 당구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이 목검을 내밀었다. 태하가 받아 들었다.
배트를 쥘 때와 달랐다. 손가락이 자루를 감는 방식이, 손목이 꺾이는 각도가. 게임 속 캐릭터가 검을 쥐는 모양 그대로였다. 태하는 목검을 한 번 허공에 그었다. 바람 소리가 났다.
박 PD가 창가에서 캠코더를 들고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림 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