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거꾸로 읽는 사람
공작부인 이졸데가 시온 아르덴의 면담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공작 각하를 거쳐 정식으로 청한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사흘이라는 날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대답이었으니, 거절할 수는 없되 기꺼이 응할 생각도 없다는 뜻을 이 집안의 안주인은 날수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면담 장소는 본관 이 층 남쪽 끝, 공작부인의 개인 응접실이었다. 벽지는 연한 살구색이었고, 창가에는 남부에서 들여온 듯한 화분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으며, 낮은 탁자 위에는 은 찻주전자와 찻잔 세 벌이 미리 차려져 있었다. 세 벌이라는 것을 보고 시온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는데, 소파 맞은편 의자에 이미 영애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덴 경, 앉으세요. 아델라이드도 함께하라고 했어요. 경께서 이 집 사람들 일로 물으실 게 있다면, 이 아이도 듣는 게 공평하겠지요."
공작부인은 부채를 반쯤 펼친 채 웃었다. 공평이라는 말을 그렇게 부드럽게 하면서 그렇게 날카롭게 들리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의붓딸 앞에서 의붓딸의 약혼자에게 심문을 받겠다는 것은 숨길 것이 없다는 과시이기도 했고, 동시에 숨길 것이 없는 사람을 의심한 기사와 그 기사를 집안에 들인 의붓딸을 한꺼번에 부끄럽게 만들겠다는 계산이기도 했다.
시온이 공작부인이 가리킨 의자에 앉고 보니 영애와는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자리였는데, 영애는 시선을 탁자 모서리께에 둔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있었다.
시온은 수첩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질문을 시작하였다. 해롤드 백작가로 보낸 바구니, 그 안에 든 남부 곡물 견본, 그 견본을 보낸 붉은 원 표식의 상인. 공작부인은 그 질문들을 끝까지 듣고 나서, 서두를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의 손놀림으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 바구니라면 기억해요. 그해 봄에 열네 곳에 보냈지요. 셀린의 혼처를 알아보던 해라, 사교계에 인사를 차려야 할 집이 많았거든요. 바구니마다 남부 특산품을 조금씩 나눠 담았어요. 상인들이 보내온 견본이 넘쳐났으니까요."
"곡물 견본도 열네 곳에 다 들어갔습니까."
"그럴 리가요. 곡물을 누가 선물로 받고 기뻐하겠어요. 말을 기르는 집에만 넣었어요. 해롤드가, 랑베르 후작가, 그리고 베일 백작가. 세 곳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바구니는 마르타가 꾸렸고, 어느 집에 무엇을 넣을지는 제 시녀 엘사가 목록을 짰지요."
시온이 해롤드가와 랑베르가와 베일가, 그리고 마르타와 엘사라는 이름을 차례로 받아 적느라 수첩을 쥔 손이 바쁜 동안, 탁자 맞은편의 영애는 움직이지도 찻잔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랑베르가와 베일가의 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글쎄요. 제가 남의 집 마구간 사정까지 알 리가 있나요. 다만 랑베르 후작가는 지난주에 무도회를 열었고, 베일 백작께서는 올봄 경마에서 우승하셨다고 들었어요. 두 집 다 말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은 없었고요."
공작부인은 부채를 접고, 면담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시온을 똑바로 보았다.
"경께서 무엇을 의심하시는지는 알아요. 이 집에서 사신 영애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사교계의 절반은 제 이름을 댈 테니까요. 그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영애의 포갠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으나, 공작부인은 그것을 보지 못한 듯, 혹은 보고도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경, 하나만 생각해 보세요. 제가 바란 건 이 아이가 시집을 가는 거였어요. 하루라도 빨리, 이 집 밖으로. 그래야 셀린의 혼삿길이 트이니까요. 약혼자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죠? 이 집에 남아요. 그리고 '사신 영애'라는 이름을 달고, 셀린의 혼삿길까지 막지요. 여섯 번이나요."
공작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자, 잔이 받침에 닿는 작고 정확한 소리가 응접실에 퍼졌다.
"제가 그걸 바랐다고 생각하세요?"
시온은 대답하지 않고 탁자 위의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계모에게 동기가 있다고 적어 둔 줄이 거기 있었는데, 방금 들은 말대로라면 그 동기는 약혼자의 죽음보다 의붓딸의 혼인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지참금이 아깝다는 동기도 있을 수 있었으나, 공작가의 지참금이 셀린의 혼삿길을 여섯 번이나 막아 가며 지킬 만한 돈인지는 그도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면담은 이것으로 충분하신가요, 경? 셀린의 의상실 약속이 있어서요."
응접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동안 시온은 수첩을 덮지 않았다. 해롤드가, 랑베르가, 베일가. 세 집에 같은 곡물 견본이 들어갔는데 한 집의 말만 미쳤다면, 들여다볼 것은 곡물 전체보다 그 한 자루였다. 바구니를 꾸린 마르타와 목록을 짠 엘사, 그리고 바구니가 저택을 떠나기 전까지 그 곁을 지나간 모든 사람.
반걸음 앞에서 걷던 영애가 계단참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지 않은 채 작게 말하였다.
"엘사는 그해 가을에 그만뒀어요."
시온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가 아직 누구에게도 묻지 않은 이름이었다.
"…무엇이라고요."
"공작부인의 시녀 엘사요. 해롤드 백작님 장례식이 끝나고 석 달쯤 뒤에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그 뒤로 공작부인께서는 시녀를 두 번 바꾸셨고요."
시온은 영애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자기 손에 들린 수첩으로 눈을 옮겼다. 펼쳐진 페이지의 맨 아래에, 면담이 끝나 갈 무렵 그가 급히 적어 넣은 한 줄이 있었다. 시녀 엘사 — 행방 확인.
그 줄은 그가 공작부인의 말을 들으며 탁자 위에서 적은 것이었다. 영애가 앉은 맞은편 자리에서 보면 글씨가 거꾸로 보이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 줄을 소리 내어 읽지도, 누구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영애."
"네."
"제 수첩을 읽으셨습니까."
영애가 그제야 천천히 돌아섰다. 시선은 여전히 그의 단추께였고 목소리도 여전히 작았으나, 그 작은 목소리 끝에, 처음으로 아주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거꾸로 읽는 건 어렵지 않아요. 경의 글씨가 반듯하셔서요. 특히 '엘'은 획이 분명해서 거꾸로 봐도 잘 보이더라고요."
시온은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기사단 시험에서 그는 암호 해독 과목을 일등으로 통과하였다. 그런데 정작 자기 수첩을 탁자 위에 펼쳐 놓으면 맞은편에서 거꾸로 읽힌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범인은 늘 맞은편에 앉았고, 범인이 그의 수첩을 읽을 거라고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다른 것도 읽으셨습니까."
"광기풀이요?"
영애는 무엇을 그리 놀라느냐는 듯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남부 습지에서 나는 말 흥분제라고 적혀 있었어요. 반 시진 뒤 발광. 기사단 의무관께서 알아보신 거죠? 저는 그 풀 이름을 몰랐어요. 북부 도감에는 없는 풀이라서."
영애는 그 말을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계단을 내려갔고, 남색 드레스 자락이 계단을 한 칸씩 스치며 멀어졌다.
계단참에 혼자 남은 시온은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이 집에 드나든 뒤로 그가 적은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으니, 동기와 기회와 마구간 방문과 사흘 뒤의 낙마까지, 영애에 대한 의심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맨 앞 장에 처음 적었던 한 줄. 아델라이드 크로웰 — 여섯 사건 모두에 연결된 유일한 인물.
그 줄도 읽었을 것이다. 거꾸로, 그 반듯한 글씨 그대로.
그는 수첩을 덮어 품속 깊이 넣었다. 그리고 그날 밤 기사단 숙소로 돌아가서, 새 수첩 한 권을 샀다. 표지가 단단하고, 펼치면 맞은편에서 안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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