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암살의 밤
항주(杭州)의 늦가을 밤은 서호(西湖)에서 올라온 물안개가 담장을 넘어 마당 깊숙이까지 스며드는 때였으니, 진가장(秦家莊)의 등롱 불빛도 그 안개에 젖어 노랗게 번지며 흔들리고 있었다.
소한은 안채 처마 아래를 지나다 걸음을 멈추었다. 열린 창틀 위에 찻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식은 찻물 위로 안개가 내려앉아 희미한 막을 이루고 있었다. 열 살에 이 집 대문을 들어선 뒤로 서른다섯 해를 하루같이, 찻잔은 탁자 위에 두셔야 바람에 식지 않는다고 아뢰어 왔으나, 주인의 찻잔은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창틀 위에 있었다.
"한아." 창 안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주인님."
"찻잔은 거기 두어라."
소한은 뻗으려던 손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일흔의 나이에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주인은 하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고, 마흔다섯의 하인 또한 주인이 그것을 알면서 짐짓 그리하신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 두 사람은 그렇게 서른다섯 해를 한 지붕 아래서 늙어 온 터였다.
그런데 그날 밤은 무언가가 어긋나 있었다. 마당 구석 개집에서 밤마다 짖던 누렁이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고, 대문 위에 걸린 등롱 두 개 가운데 하나가 꺼져 있었다. 해 질 녘에 기름을 채운 것은 소한 자신이었으니, 바람 탓이라 하기에는 공교로웠고 기름 탓이라 하기에는 더욱 공교로웠다.
"주인님."
"안다."
방 안에서 검이 칼집을 떠났다. 소리라 부르기도 민망한, 비단 자락이 비단 자락을 스치는 듯한 기척이었다. 천류검법(天流劍法)을 쓰는 주인의 검은 칼집을 떠날 때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한은 들고 있던 걸레를 처마 밑 대야 위에 반듯하게 접어 걸어 두고, 벽에 기대어 둔 목검을 집어 들었다. 하인의 손에 진검이 들릴 일은 없었으니, 서른 해 가까이 주인의 새벽 수련을 곁에서 지켜보았으되 그의 손에 들려 본 것은 빗자루와 걸레와 이 낡은 목검뿐이었다.
물안개 너머 담장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하나둘 솟아올랐다. 처음에는 셋이더니 이내 일곱이 되었고, 소한이 숨을 한 번 고르는 사이에 열넷으로 불어나 있었다.
첫 번째 그림자가 마당에 발을 딛기도 전에 그 목이 안개 속으로 떨어졌고, 뒤따르던 둘은 서로가 휘두른 칼끝에 서로의 옆구리를 내주었다. 진천명의 검은 산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과 같아서, 막으면 바위를 돌아 흐르듯 비켜 들어가고, 피하면 낮은 데로 스미듯 끝내 따라 들어갔다.
소한은 그 흐름을 서른 해 가까이 보아 왔다. 동이 트기 전 마당 구석에서 빗자루를 쥔 채로, 일식(一式)에서 십이식(十二式)에 이르기까지, 주인이 입안으로 나직이 읊조리던 검결(劍訣) 한 구절 한 구절까지 귀에 담아 왔다. 다만 보기만 하였을 뿐이었다.
"한아, 안으로 들거라."
"그리는, 못 하겠습니다."
"……이놈이."
꾸짖는 목소리 끝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사지(死地) 한가운데서도 저리 웃으시니 과연 주인다운 일이라고, 소한은 생각하며 목검을 내리쳤다. 다가오던 그림자의 손목뼈가 목검 아래서 꺾이는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고, 그림자의 손에서 빠져나간 칼이 흙바닥을 구르자 소한은 그것을 발끝으로 차서 화단 너머로 날려 보냈다. 날붙이가 마당에 나뒹굴면 내일 아침 누군가 밟을 것이었다.
열넷이 일곱이 되고, 일곱이 셋이 되었으며, 이윽고 마당에 서 있는 그림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담장 위에는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자는 앞선 무리와 서 있는 품부터가 달랐다. 몸에 무게라고는 한 푼도 없는 사람처럼 기와 끝에 깃털같이 얹혀 있었고, 검은 복면과 검은 옷자락은 물안개를 두르고도 젖지 않은 듯 고요하였다. 진천명이 처음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누구냐."
대답 대신 그림자가 담장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소한은 보았다. 막으면 돌아 들어가고 피하면 따라 들어가는, 물처럼 흐르는 검을.
천류검법을 닮은 검이었다. 칠 할은 한 줄기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였으나, 나머지 삼 할은 굽이마다 비틀려 있었다. 강물이 바위에 부딪혀 물길을 꺾듯 흐름이 한 굽이씩 꺾일 때마다, 주인의 검은 그 꺾이는 자리에서 반 박자씩 늦었다.
진천명이 한 걸음을 물러섰다. 소한이 모신 서른다섯 해 동안 처음 보는 물러섬이었다.
"그 검을…… 어디서……."
복면 아래에서는 아무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서른다섯 해 동안 주인의 등 뒤에 서 있던 두 다리가, 그날 처음으로 주인의 등 앞으로 뛰어들었다.
목검이 두 동강이 났고, 그다음은 소한의 가슴이었다. 차디찬 쇠붙이 하나가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빠져나갔으니 뜨거움보다 서늘함이 먼저 닿았고, 소한은 무릎을 꿇은 채 눈앞의 흙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아침에 손수 쓸어 둔 마당이었다. 비질 자국이 아직 고르게 남아 있었으니, 깨끗하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아!"
고개를 드니 주인이 복면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다. 세 합이 지나도록 일흔의 천하제일검이 처음으로 밀리고 있었다. 꺾이는 흐름 앞에서 늦어지는 반 박자가 한 번, 두 번 쌓여 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복면이 검을 왼손으로 바꾸어 쥐었다. 오른손으로 시작된 검이 왼손에서 끝을 맺었다. 천류검법 열두 식 어디에도 없는 수였다. 주인의 검이 왼편을 막아서는 그 찰나에, 반대편에서 파고든 검끝이 주인의 오른 옆구리를 꿰뚫었다.
진천명이 쓰러졌다. 소한의 바로 곁이었다.
흙바닥 위에 주인의 얼굴이 있었다. 일흔 해의 주름과 서리처럼 센 수염, 서른다섯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세숫물을 떠 올린 그 얼굴이 한 자 거리에 있었다.
"……한아."
"……예, 주인님."
"찻잔은……."
이런 때에 하실 말씀이 그것이냐고, 소한은 웃고 말았다.
"……창틀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잘하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복면은 쓰러진 두 사람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왼손에 쥔 검끝에서 핏방울이 하나, 또 하나 떨어져 흙에 스몄다. 이윽고 그자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담장을 넘었다.
소한은 그 뒷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꺾이는 흐름과, 왼손으로 바꾸어 쥐던 손목의 각도와, 담장을 넘을 때 왼발부터 딛는 버릇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눈앞이 물안개처럼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내일 아침 마당은 누가 쓰나 하는 것이었다.
"한아! 이놈, 한아! 해가 중천에 떴거늘!"
등짝에 손바닥이 떨어졌다. 맵고 묵직한 손이었다.
소한은 눈을 떴다. 마당이었다. 그러나 흙바닥 어디에도 핏자국은 없었고, 쓰러진 그림자도, 동강 난 목검도 보이지 않았다. 늦가을의 물안개 대신 봄볕이 마당 가득 내려앉아 있었으며, 담장 위에서는 참새 두 마리가 기와 한 장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걸레를 쥔 채 졸면 걸레가 제 발로 마당을 닦아 준다더냐?"
고개를 돌리니 왕 노인이 서 있었다. 열 살배기 소한의 손에 처음 빗자루를 쥐여 준 노인이었고, 열다섯 해 전 겨울에 소한이 제 손으로 염을 해 드린 노인이었다. 그 노인이 지팡이를 옆구리에 낀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서, 미간을 찌푸리며 소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 어르신."
"어르신은 무슨. 자다 깨더니 어른 부르는 법도 잊었느냐? 집사님이라 하였다."
소한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았다. 손등에는 굳은살 대신 갓 아문 생채기가 나 있었고, 손가락 마디는 가늘고 여렸다. 그리고 그 손에 젖은 걸레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다리가 가벼웠다. 지난 십 년 동안 비만 오면 쑤셔 대던 왼 무릎이 아무 기척도 없었다. 소한은 말없이 마당 저편 우물가로 걸어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 뒤, 그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깡마른 볼과 덜 자란 턱을 한 열다섯 살의 얼굴이 그를 마주 보았다. 소한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물속의 소년도 따라서 눈을 감았다 떴다.
"이놈이 참말로 어디가 탈이 났나. 낯빛이 왜 그 모양이냐?"
왕 노인이 다가와 거친 손바닥으로 소한의 이마를 짚었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평생 빗자루를 쥔 손이었다.
"열은 없다마는."
"……괜찮습니다, 집사님."
목소리가 갈라졌다. 변성기의 목소리였다. 소한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하였다.
"……참으로 괜찮습니다."
"괜찮은 놈이 어찌 눈물을 흘리느냐?"
그제야 소한은 제 뺨이 젖어 있음을 알았다. 손등으로 훔치다가 걸레 쥔 손이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흙물이 얼굴에 번진 뒤였고, 왕 노인은 혀를 차며 돌아섰다.
"가서 낯이나 씻거라. 오늘 아침 반찬에 장씨 아주머니가 고기를 넣었다더라. 늦으면 소복이 놈이 남김없이 먹어 치울 게다."
멀어지는 왕 노인의 등을 바라보며, 마흔다섯 해를 산 하인의 머릿속은 그제야 셈을 시작하였다. 왕 노인이 살아 있고 제 목소리마저 변성기에 갈라지는 것을 보면, 지금은 소한이 열다섯 되던 해의 봄일 것이었다. 그리고 열여덟 되던 해의 봄에, 이 집에는 불이 났다.
항주의 불이었다. 진가장의 절반이 잿더미가 되었고, 그 불길 속에서 부인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그날 이후 주인은 다시는 웃지 않으셨다. 사파(邪派)의 무리를 쫓아 삼 년 동안 강호를 피로 씻으셨고, 돌아오셨을 때는 소한이 알던 사람이 아니게 되어 계셨다.
삼 년이 남아 있었다.
소한이 걸레를 움켜쥐자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 안채의 문이 열렸다.
진천명이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일흔의 주름도 서리 같은 백발도 없이, 먹물처럼 검은 수염에 어깨가 넓은 마흔의 사내였고, 허리에 찬 검이 봄볕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강남(江南)에서 검객 진천명이라 하면 이름깨나 알려졌으되 아직 그를 천하제일이라 부르는 이는 없던 시절이었다. 주인의 눈길이 마당을 한 바퀴 돌다가 소한에게서 멈추었다.
"한아."
소한은 허리를 숙였다. 열다섯 살 하인의 허리가 서른다섯 해의 버릇대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꺾였다.
"예, 주인님."
"밥은 먹었느냐."
"……아직이옵니다."
"먹고 하거라."
주인은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뒷산으로 아침 수련을 하러 가시는 길이었다. 오른발, 왼발, 다시 오른발. 살아서 걷고 계셨다.
소한은 허리를 편 다음 안채로 들어가 창가에 섰다. 창 너머로 대문을 나서는 주인의 뒷모습이 보였는데, 걸음의 보폭과 어깨의 높이며 오른손이 검 자루에 닿는 각도까지 천류검법 일식의 기수(起手)와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았다. 소한은 그 걸음이 대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그러고는 창틀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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