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검결
바위터의 밤은 소나무 숲이 바람을 걸러 내는 탓에 산 아래보다 한결 고요하였으니, 솔잎 사이로 새어 든 달빛만이 넓적한 바위 위에 은가루를 뿌린 듯 얇게 깔려 있었다. 낮이면 주인이 서던 자리였다. 바위의 한가운데가 다른 데보다 희미하게 반들거리는 것은 스무 해 가까이 같은 자리를 디딘 발바닥이 돌의 결을 닳게 한 까닭이었고, 소한은 그 반들거리는 자리를 아직 밟지 않은 채 바위 아래 구석에 서 있었다.
전생에서 그는 이 구석을 떠난 적이 없었다. 동이 트기 전 주인보다 먼저 올라와 바위 위의 솔잎을 쓸어 내고, 주인이 검을 거두면 수건과 찻물을 올리고, 그 사이의 한 시진 남짓을 빗자루를 쥔 채 꼼짝 않고 서서 보냈다. 하인이 주인의 수련 자리에 오를 까닭이 없었으니, 서른 해 가까이 그가 바위에 발을 올린 것은 오직 솔잎을 쓸 때뿐이었다.
소한은 신을 벗어 바위 아래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고는 맨발로 바위에 올랐다. 돌은 밤이슬을 머금어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발바닥을 타고 정강이까지 기어올랐다.
마흔다섯 해를 살고 처음 밟아 보는 자리였다.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천류검법 일식의 이름은 운개일선(雲開一線)이었다. 구름이 갈라지며 한 줄기 빛이 내린다는 뜻이었고, 주인은 그 일식을 펼치기 전에 늘 입안으로 검결 네 구절을 읊조렸다.
기침단전(氣沈丹田)하고, 의선어검(意先於劍)하라.
보여유수(步如流水)하고, 검수천의(劍隨天意)하라.
기운은 단전에 가라앉히고, 뜻은 검보다 앞서게 하라. 걸음은 흐르는 물과 같이 하고, 검은 하늘의 뜻을 따르게 하라. 소한은 그 네 구절을 서른 해 가까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었다. 주인의 목소리가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 어떻게 달랐는지, 어느 해 겨울 고뿔이 들어 그 검결이 쉰 목소리로 흘러나왔는지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 뜻을 몸으로 헤아려 본 적은 없었다. 기운을 단전에 가라앉히라 하나, 하인의 몸에 가라앉힐 기운이 있을 리 없었다.
소한은 주인이 서던 반들거리는 자리에 두 발을 놓았다.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무릎을 반쯤 굽히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주인의 기수였다. 바위터 구석에서 수천 번을 바라본 그 자세였으니, 발끝의 각도며 무릎이 굽는 깊이까지 눈에 훤하였다.
그런데 무릎이 떨렸다. 한 호흡이 채 지나지 않아 허벅지 안쪽이 저려 오기 시작하였고, 두 호흡째에는 종아리가 제멋대로 경련하였다. 주인은 이 자세로 일각을 서 있다가 검을 뽑았다. 소한은 열 호흡을 넘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위가 엉덩이를 차갑게 받아 주었다. 소한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한동안 달을 올려다보았다.
……주인님께서는 이걸 숨 한 번 들이쉬는 사이에 잡으셨지.
서른 해 가까이 보았으니 다 안다고 여겼던 것이 우스웠다. 그는 주인의 발이 어디에 놓이는지를 알았지, 그 발을 거기에 놓고 버티는 허벅지가 어떤 것인지는 몰랐다. 눈은 늙었으나 다리는 열다섯이었고, 그 열다섯도 빗자루와 물동이 말고는 들어 본 것이 없는 다리였다. 소한은 바위를 짚고 다시 일어섰으나, 짚은 손바닥마저 저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 번째에는 자세를 버리고 검결부터 따라 해 보기로 하였다. 주인은 첫 구절을 읊을 때 숨을 길게 들이쉬어 아랫배 깊숙이 내려보냈고, 둘째 구절에서 그 숨을 붙든 채 눈을 감았다. 셋째 구절에 이르면 감았던 눈을 뜨며 한 발을 내디뎠고, 넷째 구절의 끝 글자와 함께 검이 칼집을 떠났다.
소한은 빈손을 허리춤에 얹었다. 검 자루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손바닥에 아무것도 닿지 않는 것이 어색하였으나, 서른다섯 해 동안 그 손에 쥐어 본 검이라고는 낡은 목검 한 자루뿐이었으니 진검의 무게는 어차피 알지 못하였다.
숨을 들이쉬었다. 기침단전.
아랫배로 숨을 내려보내려 하였으나 숨은 가슴께에서 머물렀다. 더 깊이 밀어 넣으려 하자 명치가 뻐근하게 조여 왔다. 소한은 개의치 않고 숨을 붙들었다. 의선어검. 눈을 감았다. 뜻을 검보다 앞세우라 하였는데, 앞세울 뜻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주인이 그 대목에서 눈을 감고 오래도록 숨을 참았다는 것만 알았으므로, 그도 숨을 참았다.
열을 세었다. 스물을 세었다. 귓속에서 피가 도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커졌다.
보여유수. 눈을 뜨며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하늘이 기울었다. 달이 비스듬히 미끄러지더니 솔가지 사이로 사라졌다. 소한은 내디딘 발을 딛지도 못한 채 옆으로 쓰러졌다. 어깨가 바위 모서리에 부딪히는 둔한 소리가 났다. 아프다는 생각은 한참 뒤에야 들었다.
누운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목구멍이 쓰렸다. 눈앞에서 하얀 점들이 날파리처럼 어른거렸다.
검결은 숨을 참으라는 말이 아니었던 게다.
소한은 바위에 뺨을 댄 채로 그 사실을 곱씹었다. 주인의 숨은 그 대목에서 저절로 고요해졌을 것이다. 단전에 내려앉은 기운이 숨을 대신 쉬어 주었으니 겉으로 들고 나는 숨이 보이지 않았을 뿐인데, 하인의 눈에는 그것이 숨을 참는 것으로 보였던 게다.
서른 해 가까이 들은 검결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으나, 그 글자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그는 한 번도 여쭌 적이 없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을 일으켜 보니 달은 이미 서쪽 능선에 걸려 있었고, 동쪽 하늘의 먹빛이 조금씩 묽어지고 있었다. 사경(四更)을 넘긴 것이 분명하였다.
소한은 신을 신으려다 말고 바위 위를 내려다보았다. 이슬 젖은 바위 위에 맨발 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주인이 서던 반들거리는 자리 둘레로,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넘어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자리에는 흙 묻은 자국이 동그랗게 번져 있었다.
서른 해 가까이 이 바위를 쓸어 온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소매를 걷어 바위 위의 발자국을 하나하나 문질러 지웠다. 소매가 축축해지고 흙빛으로 물들었다. 마지막 자국까지 지우고 나자, 바위는 다시 주인 한 사람만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렸다. 열 걸음에 한 번씩 솔뿌리에 발이 걸렸고, 그때마다 그는 곁의 소나무 둥치를 붙들고 숨을 골랐다. 동녘 하늘은 어느새 잿빛에서 연한 쪽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으며, 산허리를 감싼 안개가 골짜기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려 진가장의 기와지붕들을 하나씩 덮어 가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이 길을 만 번 넘게 오르내리며 한 번도 숨이 차 본 적이 없었으나, 열다섯의 다리는 아직 이 길을 알지 못하였다.
행랑채에 닿은 것은 닭이 두 번째로 울 무렵이었다. 소복은 이불을 걷어찬 채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고, 소한은 그 이불을 도로 덮어 준 뒤 젖은 소매를 벗어 빨랫줄 뒤편에 숨겨 널었다. 그리고 빗자루를 들고 안마당으로 나갔다.
그날 아침의 비질은 결이 고르지 못하였다. 허벅지가 떨려 빗자루 끝이 이따금 흙을 깊이 파고들었고, 그때마다 소한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 마당 하나를 쓰는 데 평소의 곱절이 걸렸다.
해가 솟고 한 식경쯤 지나 진천명이 안채에서 나왔다. 뒷산으로 오르시는 길이었다. 소한은 빗자루를 세워 들고 허리를 굽혔다.
주인은 대문 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한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비질을 두 번 한 자리가 다른 데보다 조금 깊게 패어 있었다.
"한아."
"예, 주인님."
"어젯밤에 바람이 셌느냐."
"……그리 세지는 않았던 줄 압니다."
주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소한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깊게 팬 비질 자국 하나로 무엇을 알아차리실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 보았으나, 이 사람은 훗날 천하제일검이 될 사람이었다.
"서연이가 요 며칠 밤에 잠을 안 잔다고 부인이 걱정하더구나."
"예."
"바위터에 올라오겠다고 조르던 아이다. 밤에 혼자 오를까 걱정이다. 혹 뒷산 쪽으로 가는 것을 보거든 내게 일러라."
소한은 굽힌 허리를 더 깊이 굽혔다. 굽힌 허리 아래로 보이는 것은 두 번 쓸어 깊게 팬 흙 한 자리뿐이었고, 그 자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넓어 보였다.
"예, 주인님. 각별히 살피겠습니다."
"그래."
주인은 그 말만 남기고 대문을 나섰다. 소한은 허리를 편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대문 너머로 사라지는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밤마다 바위터에 오르는 그 아이는 지금 주인님께서 방금 각별히 살피라 이르신 하인 놈이옵니다.
물론 입 밖에 낼 말은 아니었으니, 소한은 빗자루를 고쳐 쥐고 깊게 팬 자리부터 다시 고르게 쓸어 나갔다.
그날 하루 소한은 일을 하면서 틈틈이 다리를 주물렀다. 물동이를 지고 우물과 주방을 오갈 때마다 허벅지가 비명을 질렀으나, 그 비명 속에서 오히려 무언가가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인이 바위 위에서 펼치던 일식은 마흔 해 동안 몸에 쌓인 것들의 맨 꼭대기였다. 그 아래에는 소한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이 쌓여 있을 터였다. 주인이 소한의 나이였을 때 무엇을 하였는지, 하인은 알지 못하였다. 그 시절의 주인은 사부의 산문에 있었고, 소한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주인은 젊은 날의 수련을 이야기할 때마다 같은 말로 시작하였다. 술이 약한 분이라 한 잔만 들어가면 옛이야기가 흘러나왔고, 그 옛이야기는 늘 산문 앞마당에서 시작되었다.
마보(馬步)로 세 해를 섰다고 하셨다. 검은 그다음이었다고.
소한은 물동이를 내려놓고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세 해라. 화재까지 남은 날도 꼭 그만큼이었다.
그날 밤, 바위터에 오른 소한은 주인의 자리에 서지 않았다. 바위 아래 구석, 서른 해 가까이 빗자루를 들고 서 있던 그 자리에 두 발을 벌리고, 무릎을 굽혔다. 열 호흡도 지나지 않아 다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하였으나, 여기서라면 엉덩방아를 찧더라도 주인의 자리를 더럽힐 일은 없었다.
소한은 열을 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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