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제일검의 시종6화 EN繁中

6화

곳간

바위터 구석의 흙이 고르게 메워져 있던 그날 밤 이후로, 소한은 왕 노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 노인은 여느 때처럼 지팡이로 행랑채 마루를 짚으며 하인들을 깨웠고, 여느 때처럼 소한의 비질에 손목 타령을 늘어놓았으며, 바위터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묻지 않는 사람 앞에서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만큼 고단한 일도 없었으니, 소한은 그 고단함을 밤마다 바위터로 가지고 올라가 마보 자세 속에 묻었다.

마보로 선 지 한 달이 넘어가자 다리는 일각을 지나 반 시진을 버티게 되었다. 허벅지는 단단해졌고, 발바닥은 땅을 누르는 법을 알게 되었으며, 무릎은 더 이상 제멋대로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검결의 첫 구절, 기운을 단전에 가라앉히라는 그 말은 여전히 남의 나라 말처럼 멀었다. 숨을 아무리 깊이 들이쉬어도 아랫배는 그저 숨이 드나드는 자리일 뿐, 거기 가라앉을 무엇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주인이 마보로 세 해를 섰다고 하신 것은 산문의 사부 곁에서였다. 사부가 내공을 다스리는 법을 일러 주었을 것이고, 산문의 밥과 약이 몸을 받쳐 주었을 것이다. 행랑채의 열다섯 살 하인에게는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다리만 단단해진 채로 세 해를 서 봐야, 세 해 뒤 불길 앞에서 들 수 있는 것은 물동이뿐일 것이었다.

소한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전생의 기억을 뒤적였다. 서른다섯 해 동안 주인 곁에서 보고 들은 것들 가운데, 열다섯의 몸에 기운을 심어 줄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던가. 기억은 한참을 헤매다가, 잿더미 속에서 건져 올린 작은 함 하나 앞에서 멈추었다.


진가장의 곳간은 안채 뒤편, 장독대와 우물 사이에 낮게 엎드린 흙벽 건물이었다. 쌀과 곡식과 장작은 물론이요, 철마다 들어오는 선물과 쓰지 않는 세간살이가 차곡차곡 쌓이는 곳이었으니, 집안의 물건 가운데 한번 곳간에 들어간 것이 다시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전생에서 소한이 그 상자를 본 것은 화재가 꺼진 이튿날이었다. 불길은 곳간의 절반을 삼켰고, 하인들은 잿더미 속에서 쓸 만한 것을 골라내느라 사흘 밤낮을 매달렸다. 그때 무너진 선반 아래에서 옻칠이 반쯤 녹아내린 작은 함 하나가 나왔다. 뚜껑에는 산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안에는 새카맣게 탄 환약 세 알이 들어 있었다.

함을 주인께 올리자, 주인은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나직이 말씀하셨다. 하산할 때 사부께서 주신 것인데, 쓸 데가 없어 넣어 두고는 스무 해 넘게 잊고 지냈다고. 그러고는 함을 소한에게 도로 내주며 버리라고 하셨다. 그 목소리에 아쉬움은 없었다. 그 무렵의 주인에게 아쉬운 것은 오직 불길 속에서 잃은 한 사람뿐이었다.

소한은 그 함을 버리지 못하고 몇 해를 행랑채 궤짝에 넣어 두었다가, 어느 겨울 이사를 하며 잃어버렸다. 환약의 이름도 알지 못하였다. 다만 탄 껍질 사이로 비치던 푸른빛과, 손바닥에 닿던 서늘한 기운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함이 지금 곳간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채로.

소한은 그 생각을 하며 오래 망설였다. 주인의 물건이었다. 하인이 주인의 곳간에서 물건을 꺼내어 몰래 삼키는 것은, 어떤 말로 꾸미든 도둑질이었다. 전생에서 왕 노인은 하인의 손버릇을 가장 엄하게 다스렸고, 소한 자신도 집사 노릇을 하는 동안 손버릇이 나쁜 하인을 셋이나 내보냈다.

그러나 그 함은 세 해 뒤에 불탈 물건이었다. 주인은 그것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계셨고, 잃은 뒤에도 아쉬워하지 않으셨다. 불길이 가져갈 것을 하인이 먼저 가져가는 것이 도둑질이라면, 소한은 그 도둑질의 값을 세 해 뒤 불길 앞에서 치르기로 하였다.


봄 곳간 정리는 해마다 장 담그는 날 이튿날에 하였다. 묵은 곡식을 꺼내 볕에 말리고, 쥐가 쏠아 놓은 자루를 갈고, 쓰지 않는 세간을 한쪽으로 몰아 쌓는 일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쓰는 고된 일이라 하인들 사이에서는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였고, 왕 노인은 해마다 제비뽑기로 두 사람을 골랐다.

올해 제비는 소복과 마부의 조카 아이에게 떨어졌다. 소한은 그날 저녁 소복을 장작더미 뒤로 불러냈다.

"곳간 일, 내가 대신 하마."

소복의 가는 눈이 커졌다. 그러다 곧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너 또 뭐 꿍꿍이냐."

"꿍꿍이는 무슨. 너는 먼지만 마시면 기침을 하지 않느냐. 대신 너는 내 빨래 당번을 닷새 맡아라."

"닷새는 많다. 사흘."

"나흘."

"……꿀단지 얘기는 끝까지 안 하는 거지?"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다."

소복은 손가락을 꼽으며 한참 셈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곳간 먼지 한 번에 빨래 나흘, 거기에 지난달 꿀단지 일을 끝까지 덮어 주는 값까지 얹었으니 저울은 대강 맞았다.

이튿날 곳간 문이 열리자, 소한은 마부의 조카 아이에게 볕 드는 마당에서 곡식 자루를 말리는 일을 맡기고, 자신은 안쪽 깊숙한 선반 정리를 자청하였다. 아이는 어두운 곳간 안보다 마당이 좋다며 반겼다.

곳간 안은 서늘하고 어두웠다. 오래된 곡식 냄새와 쥐 오줌 냄새, 그리고 나무가 삭는 냄새가 한데 섞여 있었다. 소한은 등잔을 들고 선반을 하나씩 훑었다. 혼례 때 들어온 병풍, 깨진 항아리, 이제는 아무도 쓰지 않는 다듬잇돌, 주인이 젊은 날 썼다는 낡은 검집 두어 개.

전생에서 그 함은 맨 안쪽 선반, 쌀독 뒤에서 나왔다. 무너진 선반의 위치로 보아 원래는 그 선반의 셋째 칸쯤이었을 것이다.

셋째 칸에는 먼지가 손가락 마디만큼 쌓여 있었다. 소한은 먼지를 털어 내며 그 안을 더듬었다. 낡은 보자기와 녹슨 촛대와 이가 빠진 사발이 차례로 손에 걸렸고, 맨 안쪽에서 손끝에 매끄러운 것이 닿았다.

옻칠한 함이었다. 손바닥 하나를 겨우 넘는 크기였고, 뚜껑에는 물결이 휘감긴 산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전생에서 본 그 문양이었다. 다만 그때는 녹아내려 반쯤 뭉개져 있었고, 지금은 칼로 새긴 듯 또렷하였다.

소한은 등잔을 내려놓고, 숨을 한 번 고른 뒤 뚜껑을 열었다. 비단에 싸인 환약 세 알이 들어 있었다. 손톱만 한 크기였고, 등잔 불빛 아래서 연한 푸른빛을 띠었다. 손을 가까이 대자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을 스쳤다. 탄 껍질 사이로 비치던 바로 그 빛이었다.

소한은 한 알만 꺼냈다. 셋을 다 가져가면 언젠가 함을 열어 본 누군가가 알아챌 것이었다. 한 알이 빈 것은 스무 해 가까이 묵은 함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환약을 깨끗한 헝겊에 싸 품속 깊이 넣고, 함의 뚜껑을 닫아 원래 자리에 원래 방향으로 돌려놓은 뒤, 그 앞에 녹슨 촛대와 이 빠진 사발을 아까와 똑같이 세워 두었다. 먼지까지 다시 덮을 수는 없었으나, 곳간 정리를 한 날이니 먼지가 줄어든 것을 따질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날 하루 소한은 누구보다 열심히 곳간을 정리하였다. 쥐가 쏠은 자루를 모두 갈고, 깨진 항아리를 내다 버리고, 선반의 물건들을 크기대로 다시 쌓았다. 저녁 무렵 곳간을 둘러본 왕 노인이 지팡이로 선반 하나를 툭 치더니, 올해는 쥐도 길을 잃겠다고 한마디 하였다. 소한은 고개를 숙였다. 품속의 헝겊이 가슴에 닿아 서늘하였다.

그날 밤, 소한은 바위터 구석에 앉아 헝겊을 풀었다. 달빛 아래서 환약은 곳간에서보다 더 푸르게 빛났다. 그는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아무 맛도 없었다. 혀 위에서 천천히 녹으며 차가운 물처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 차가움이 가슴을 지나고 명치를 지나 아랫배에 닿는 순간, 차가움이 불로 바뀌었다.

소한은 바위를 짚고 몸을 웅크렸다. 아랫배 한가운데서 무언가가 타올랐다. 뜨거움이 실처럼 가늘게 퍼져 나가 허리로, 등으로, 팔다리의 끝으로 기어갔다. 혈맥을 따라 누군가 달군 바늘을 밀어 넣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었다. 소리를 내면 산 아래까지 들릴 것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뜨거움이 조금씩 물러갔다. 팔다리 끝에서부터 거두어들여지듯, 다시 아랫배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었다.

소한은 숨을 골랐다. 땀이 등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위 아래 구석에 두 발을 벌리고 섰다. 무릎을 굽히고, 숨을 들이쉬었다.

기침단전.

숨이 내려갔다. 가슴께에서 멈추지 않고, 명치를 지나, 아랫배 깊은 곳까지. 그리고 거기에, 처음으로, 숨이 아닌 무언가가 있었다. 콩알만 한 온기였다. 손바닥으로 덮으면 사라질 만큼 작았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소한은 그 온기 위에 숨을 얹은 채,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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