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키박스
비상등은 초록색이었다. 사람 얼굴이 전부 아파 보이는 색이었다.
"냉장 구역 지금 몇 도예요?"
"4도."
만식이 벽의 온도계를 손전등으로 비추며 말했다. 냉장 구역 출입문 옆, 정우가 매일 밤 일지에 옮겨 적던 숫자였다.
"문 안 열면 몇 시간 버텨요?"
"여름이면 반나절. 지금은 10월이니까 하루쯤. 근데 계란이랑 우유는 그 전에 간다."
정우는 머릿속으로 냉장 재고를 넘겼다. 계란 6판. 우유 300팩. 돼지고기, 닭고기, 냉장 도시락. 그게 다 이틀 안에 쓰레기가 된다.
"키가 필요해요."
센터장이 정우 뒤에서 작게 말했다.
"…내가 가지러 갈까?"
모두가 센터장을 봤다. 센터장은 젖은 정장 바지에, 굽 없는 구두 한 짝을 신고 있었다.
"아니요."
정우와 만식이 동시에 말했다.
보람이 2층 계단참 창문에서 내려왔다.
"밖에 개 다섯 마리요. 두 마리는 주차장 저쪽, 세 마리는 4번 비상구 근처. 아까 그 개 냄새 맡고 온 것 같아요. 하나는 아예 세단 옆에 엎드려 있어요."
"세단 문은요?"
"운전석 문 열려 있어요. 시동은 아직 켜져 있고요."
비상구를 열고 나가 세단까지는 4미터. 차 안에 손을 넣어 키를 꺼내고 다시 들어오는 데 최소 5초. 개 세 마리 앞에서.
정우는 생각했다. 사람이 키를 가지러 갈 필요는 없었다.
"센터장님, 키 꾸러미가 차 어디 있어요?"
"그게… 스마트키라서. 컵홀더에 던져 놨는데. 내릴 때 정신이 없어서…."
"바닥에 떨어졌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센터장님 방 창문이 4번 비상구 바로 위죠?"
센터장이 눈을 깜빡였다.
"…어. 그렇지. 내 방이 거기지."
센터장실은 B동 2층 끝이었다. 7년 동안 정우가 그 방에 들어간 건 네 번이었다. 시말서 한 번, 연장 근무 동의서 두 번, 정규직 전환 면담 한 번. 면담은 10분 걸렸다. 결과는 '다음 기회에'.
센터장실은 넓었다. 책상, 소파, 본사 표창장 액자. 그리고 문 옆 벽에 키박스.
철제 상자 안에 고리가 서른 개. 고리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발전기실, 냉장 구역 기계실, 전산실, 지게차 1~4호기, 경비실, 옥상. 고리는 전부 비어 있었다.
"원래 여기 다 걸어 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보람이 물었다.
"…분실 위험이 있어서 내가 갖고 다녔지."
센터장이 말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정우는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봤다.
4미터 아래, 회색 세단. 열린 운전석 문 안쪽이 대각선으로 보였다. 운전석 매트 위에 열쇠 꾸러미가 떨어져 있었다. 스마트키 하나에 쇠 열쇠가 스무 개 넘게 매달린 뭉치였다. 비상등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옆에 세눈들개가 엎드려 있었다. 차 문에서 1미터. 세 눈 중 두 개는 감겨 있었다. 하나는 떠 있었다.
"…저 개 깨면요?"
보람이 정우 뒤에서 속삭였다.
"열쇠는 날아와요. 개는 못 날아요."
"그게 위로가 돼요?"
"창문 높이 4미터예요. 쟤네 2미터 못 뛰어요. 아까 생수 벽 1미터 50도 못 넘었잖아요."
보람이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데가 없었다.
정우는 꾸러미를 보고, 뒤를 돌아 키박스를 봤다. 고리 서른 개. 라벨 서른 개.
어디에 뭐가 있어야 하는지 아는 것. 그게 이 스킬의 조건이었다. 열쇠가 있어야 할 곳은 키박스였다. 라벨까지 붙어 있었다. 센터장이 7년 동안 지키지 않았을 뿐.
"센터장님 열쇠 꾸러미. 로케이션 변경, 센터장실 키박스."
【로케이션 변경 요청을 확인했습니다.】
꾸러미가 떠올랐다.
운전석 매트에서 핸들 아래로, 열린 문 밖으로. 쇠 열쇠들이 서로 부딪치며 짤랑 소리를 냈다.
개의 세 번째 눈이 번쩍 떠졌다.
개가 벌떡 일어나 허공의 꾸러미를 향해 뛰었다. 이빨이 꾸러미 아래 50센티를 물었다. 빈 공기였다. 개가 떨어지며 세단 문짝에 부딪혔다. 쾅. 차가 흔들렸다.
꾸러미는 그대로 올라왔다. 4미터. 창틀. 정우의 귀 옆을 스치고, 방 안으로.
그리고 공중에서 풀렸다.
열쇠고리의 링이 벌어졌다. 스마트키가 먼저 빠져서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쇠 열쇠들이 하나씩 링에서 빠져나와 줄을 섰다. 그리고 키박스로 날아갔다.
발전기실 고리에 하나. 냉장 구역 기계실 고리에 하나. 전산실. 지게차 1호기, 2호기, 3호기, 4호기. 경비실. 옥상.
짤랑, 짤랑, 짤랑.
라벨 붙은 고리마다 열쇠가 하나씩 걸렸다. 열쇠가 고리에 걸리고 나서도 흔들림이 몇 초 이어졌다.
【분류 23건, 적재 23건.】
"…."
센터장실이 조용해졌다.
창밖에서 개가 세단을 긁는 소리만 났다.
"반장님."
보람이 키박스 앞에 섰다.
"이거 라벨 보고 찾아간 거예요? 열쇠가?"
"라벨이 있으니까요."
"열쇠가 라벨을 어떻게 알아요."
"그건 저도 몰라요."
정말 몰랐다. 정우가 아는 건 열쇠가 어디 있어야 하는지뿐이었다. 7년 동안 로케이션을 짤 때도 그랬다. 위치만 맞게 정해 두면, 나머지는 현장이 알아서 돌아갔다.
센터장이 키박스 앞으로 다가왔다. 열쇠가 하나씩 걸린 고리들을 한참 봤다.
"…원래 이렇게 걸어 놔야 되는 거였지."
혼잣말이었다. 정우는 못 들은 척했다.
발전기실은 A동 뒤편에 붙어 있었다. 건물 안에서 갈 수 있는 구조라 다행이었다.
만식이 발전기를 돌렸다. 기침 같은 소리가 세 번 나더니 엔진이 걸렸다. 몇 초 뒤, 천장의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돌아왔다. 냉장 구역 컴프레서가 다시 웅 하고 울었다.
라지브가 박수를 쳤다. 혼자서. 아무도 따라 치지 않았지만 라지브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만식은 연료 게이지를 봤다.
"경유 반 통. 다 켜 놓으면 여덟 시간."
"형광등은 휴게실만 켜고, 랙 구역은 꺼요. 전산실 서버도 끄고요. 노트북 하나면 돼요."
"그라고 냉장만 돌리면 닷새."
닷새가 지나면 경유가 필요했다.
정우는 출고장 쪽을 떠올렸다. 후진 주차된 냉장 탑차 두 대. 5톤 탑차의 연료 탱크는 200리터였다. 어제 저녁에 주유하고 들어온 차였다. 출고장 셔터 바로 밖이었다.
그건 닷새 안에 생각하면 됐다.
문제는 센터장이었다.
발전기가 돌고 한 시간쯤 지나자, 센터장은 젖은 바지를 갈아입고 돌아왔다. 사무실 사물함에 정장 한 벌이 더 있었다. 넥타이도 새로 맸다.
그리고 휴게실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자, 지금부터 상황 정리를 좀 하겠습니다."
본사 회의 말투였다.
"현재 센터는 비상 운영 체제입니다. 센터 자산, 그러니까 재고는 본사 소유입니다. 무단 사용 시 추후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재고 출고는 센터장 승인 하에…."
"재고 안 쓰면 굶어요."
정우가 말했다.
"쓰지 말자는 게 아니고. 절차를 지키자는 거지. 나중에 본사가 물어보면…."
"본사 전화 돼요?"
"…아직 안 되지."
만식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센터장 쪽으로 한 걸음. 센터장이 화이트보드 쪽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
"형님."
정우가 불렀다. 만식이 멈췄다.
정우는 센터장을 봤다. 생각해 보면 센터장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본사가 살아 있다면, 언젠가 이 재고를 누가 썼는지 물을 것이다. 생수 1톤을 랙에서 떨어뜨린 것까지. 그때 '야간조 반장이 마음대로 썼다'고 적히면, 물어내는 건 정우였다. 정규직도 아닌.
"센터장님. 승인해 주세요."
"…응?"
"비상 출고요. 센터장님 이름으로 승인하시고, 일지에 사인하시면 돼요. 뭘 언제 얼마나 썼는지는 제가 적을게요. 배분은 제가 하고요."
센터장의 눈이 계산하는 눈으로 바뀌었다. 정우는 그 눈을 알았다. 본사에 보고서를 올릴 때의 눈이었다. 비상 상황에서 센터 인원 전원 생존, 재고 관리 체계 유지, 책임자 오병철.
"…좋아. 그렇게 하지. 내가 승인권자, 정우 씨가 실무 책임."
"네."
"사인은 매일?"
"매일요."
센터장은 만족한 얼굴로 화이트보드에 '비상 운영 체계'라고 쓰고 밑줄을 두 번 그었다.
휴게실을 나오자 만식이 정우를 따라왔다.
"니 저 양반한테 왜 굽히노."
"안 굽혔어요. 사인 받은 거예요."
"그게 굽힌 기다."
"형님. 나중에 본사 다시 생기면, 생수 터진 거 누가 물어내요?"
만식이 멈췄다.
"센터장님 사인 있으면 센터장님이 물어내요. 우리 넷 말고."
만식은 한참 정우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휴게실로 돌아가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여시 같은 놈."
이틀이 지났다.
센터는 조용히 돌아갔다. 정우가 짠 생존용 로케이션대로였다. 1번 랙에 물과 식량. 휴게실에 응급 키트. 부탄가스는 출고장 반대편 끝.
냉장 재고는 상하기 전에 먹었다. 라지브가 계란 6판으로 매 끼니 다른 요리를 했다. 둘째 날 저녁엔 계란찜이 나왔는데, 센터장이 두 그릇을 먹었다. 만식은 그걸 보고 한 그릇만 먹었다.
7번 통로의 개는 방수포로 덮어서 냉동 창고 구석에 넣었다. 지게차로 팔레트째 옮겼다. 버릴 데가 없었다. 밖에 내놓으면 다른 개들이 꼬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보람은 SNS를 계속 봤다. 각성자들의 스킬 인증 글은 둘째 날부터 사냥 인증으로 바뀌었다. [화염]으로 F급 몬스터를 태웠다는 영상. [검술]로 아파트 단지를 지켰다는 글.
[정리정돈] 얘기는 셋째 날까지도 같았다.
방 청소용. 쓰레기 스킬.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스킬.
"반장님, 이 사람들 진짜 모르는 거예요. 반장님이 1톤짜리로 몬스터 잡은 거."
"몰라도 돼요."
"왜요?"
"알면 와요. 여기로."
보람은 잠깐 생각하더니 핸드폰을 내려놨다.
셋째 날 밤. 정우는 휴게실 창가에서 일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하늘의 창은 사흘째 그대로였다. 숫자만 바뀌었다.
【남은 기간: 118일】
정우는 볼펜을 귀에 꽂고 일지를 덮었다. 그때 눈앞에 창이 하나 더 떴다. 하늘이 아니라, 정우 앞에만.
【[정리정돈] 숙련도: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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