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품목 코드
발전기 경유는 하루 반 치가 남아 있었다.
정우는 아침 일지에 숫자를 적었다. 경유 20리터 추가, 잔량 하루 반. 냉장 구역 정지 시 손실 예상, 우유·냉장 도시락. 탑차 밑 말통 다섯 개, 회수 불가.
탑차 주변 개 한 마리 상주.
그리고 맨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냉동 창고, 세눈들개 1두. 가죽 30만 원.
적고 나서 펜을 멈췄다. 30만 원이라는 숫자가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은행이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세상이었다. 그래도 정부가 가격을 매겼다는 건, 곧 그게 돈이 된다는 뜻이었다.
정우는 정문 쪽 창을 한 번 보고 나서 펜을 내려놓았다.
"반장님, 저거 꺼내 보는 거예요?"
보람이 냉동 창고 쪽을 가리켰다.
"한번 보기라도 해야죠. 뭔지 알아야 분류를 하니까."
세눈들개는 휴게실 앞 통로 바닥에 눕혀졌다. 지게차로 팔레트째 꺼내 왔다. 나흘 동안 얼어 있어서 돌덩이 같았다. 털 없는 회색 가죽 위로 서리가 녹으며 물방울이 맺혔다.
다섯이 둘러섰다. 아무도 먼저 손대지 않았다.
"[분석]으로 봤는데요."
보람이 한 발 뒤에서 말했다.
"세눈들개, F급. 상태 사망. 재료 정보… 가죽, 고기, 뼈. 그리고 마정석 하. 식용 가능, 조리 필요."
"마정석이 어디 있는지도 나와요?"
"그건 안 나와요. F급 정보창이 원래 성의가 없어요."
센터장이 헛기침을 했다.
"그, 정부가 매입한다니까 그냥 통째로 넘기면 되는 거 아니야? 지정 업체에."
"지정 업체가 어디 있는데요?"
"…공고에는 '추후 안내'라고."
"추후에 오면 그때 넘기죠. 그 전에 썩어요."
정우는 박스 커터를 꺼냈다. 출고장에서 테이프 뜯을 때 쓰는 커터였다. 칼날을 끝까지 밀어냈다.
그리고 개의 배 쪽에 갖다 댔다.
칼날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우가 힘을 주자 칼날이 휘더니 툭, 하고 부러졌다.
부러진 날 조각이 바닥을 굴러갔다.
"…."
만식이 말없이 공구함에서 쇠톱을 가져왔다. 정우에게 건넸다. 정우는 쇠톱을 가죽 위에 대고 밀었다. 쇠톱이 미끄러졌다.
가죽에 흰 자국 하나 남았다.
"이거 무슨 가죽이에요."
"F급 가죽이요."
"F급이 이래요?"
"그러니까 30만 원인가 봐요."
다섯은 한동안 개를 내려다봤다. 1톤 생수 팔레트에 깔려 죽은 놈이었다.
그런데 칼도 톱도 안 들어갔다.
"제가 해 봐도 되겠습니까."
라지브였다.
라지브는 주방에서 자기 칼을 가져왔다. 천으로 감싼, 손잡이가 닳은 칼이었다. 6년 전 한국에 올 때 가방에 넣어 온 거라고 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고기 일을 하셨습니다. 염소. 축제 때마다. 저는 어릴 때 옆에서 도왔습니다."
라지브는 개 옆에 무릎을 꿇었다. 칼을 바로 대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개의 몸을 천천히 눌러 갔다.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갈비뼈로, 배로.
손가락 끝으로 가죽을 꾹꾹 누르며 무언가를 찾았다.
"가죽은 다 똑같이 단단하지 않습니다. 약한 데가 있습니다. 염소도 그렇습니다. 여기."
라지브의 손가락이 앞다리가 몸통에 붙는 겨드랑이 안쪽에서 멈췄다. 가죽이 접히는 자리였다. 라지브는 거기에 칼끝을 댔다.
힘을 주지 않고, 가죽의 결을 따라 미끄러뜨렸다.
칼이 들어갔다.
"…들어갔다."
보람이 중얼거렸다.
라지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끝을 따라 가죽이 열렸다. 겨드랑이에서 배로, 배에서 뒷다리 안쪽으로. 결을 따라서만. 결을 거스르면 칼이 미끄러졌다. 그때마다 라지브는 손을 멈추고 다시 손바닥으로 눌러 결을 찾았다.
20분이 걸렸다. 가죽 한 장이 통째로 벗겨졌다.
라지브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정우는 그걸 보고 휴게실에서 물을 한 병 가져왔다.
"쉬었다 해요."
"괜찮습니다. 지금 멈추면 고기가 녹습니다."
라지브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칼을 들었다. 이번엔 고기였다. 근육과 근육 사이, 얇은 막을 따라. 뼈에서 고기를 떼어 낼 때도 결이 있었다. 라지브는 그걸 알았다.
그리고 갈비뼈 안쪽, 심장 옆에서 손을 멈췄다.
"반장님. 여기 돌이 있습니다."
라지브가 손을 빼냈다. 손바닥 위에 엄지손가락만 한 돌이 놓여 있었다. 탁한 푸른색. 주차장 금에서 새어 나오던 그 빛을 희미하게 머금고 있었다.
"마정석."
보람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하급 마정석이요. 50만 원짜리."
해체는 한 시간 반 만에 끝났다.
통로 바닥에 비닐을 깔고 부위별로 나눠 놨다. 가죽 한 장과 고기 덩어리 여섯, 뼈 한 무더기, 그리고 마정석 하나. 라지브는 칼을 닦으며 고기를 보고 말했다.
"이 고기, 먹을 수 있습니다. 냄새가 염소랑 비슷합니다. 오래 끓이면 됩니다."
"진짜요?"
"제가 먼저 먹어 보겠습니다."
센터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만식은 아무 말 없이 고기 한 덩어리를 들어 무게를 가늠했다.
"8킬로."
"전부 합치면요?"
"30킬로 넘는다. 다섯이서 열흘은 묵는다."
계란이 떨어진 뒤로는 통조림뿐이었다. 열흘 치 고기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정우는 바닥에 나눠 놓은 부위들을 내려다봤다. 가죽, 고기, 뼈, 마정석. 그리고 휴게실 화이트보드로 가서 마커를 들었다.
세눈들개(F).
그 밑에 줄을 그었다.
A-1 가죽. 겨드랑이 결부터, 결 따라서.
A-2 고기. 근막 따라 6분할.
A-3 뼈.
A-4 마정석. 심장 왼쪽 갈비뼈 안.
보람이 뒤에서 그걸 읽었다.
"반장님, 이게 뭐예요?"
"품목 코드요."
"…품목 코드요?"
"처음 보는 물건이 입고되면 코드부터 매겨요. 그래야 랙 번호를 줄 수 있으니까."
정우는 마커 뚜껑을 닫았다. 어제 냉동 창고에서 본 창이 생각났다. 분류 기준 없음. 기준이 없었던 건 정우였다. 이 물건이 뭘로 이루어져 있고, 각 부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으니까.
이제는 알았다. 라지브가 한 시간 반 동안 보여 줬다.
정우는 화이트보드의 A-1부터 A-4까지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러고는 라지브를 돌아봤다.
"라지브 씨. 다음에 한 마리 더 생기면요."
"네."
"칼 들기 전에 저 먼저 불러 주세요."
라지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습니까?"
"보고 싶어서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우는 그렇게만 말했다. 대신 바닥의 부위들을 봤다. 비닐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고기 덩어리 여섯 개, 뼈 무더기, 둘둘 말린 가죽.
"고기, 로케이션 변경. 냉동 창고 2번 칸. A-2."
【로케이션 변경 요청을 확인했습니다.】
고기 덩어리들이 떠올랐다. 이번엔 어제와 달랐다. 덩어리들이 크기 순으로 줄을 서더니, 냉동 창고 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큰 것부터 안쪽으로. 뼈는 뼈대로, 가죽은 가죽대로 다른 칸을 찾아갔다.
마정석만 남았다. 정우가 손을 대고 "입고"라고 말하자 푸른 돌이 손바닥에서 사라졌다. [창고]에 들어갔다.
어제는 개 한 마리를 통째로 넣으려다 반려당했다. 오늘은 그 개였던 것들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갔다.
"…반장님."
보람이 화이트보드와 냉동 창고를 번갈아 봤다.
"코드 붙이니까 되는 거예요?"
"그런가 봐요."
"그럼 다음엔요? 라지브 씨가 칼 안 들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반장님이 코드를 아니까, 처음부터…."
보람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정우를 봤다. 정우는 대답 대신 바닥에 깔린 비닐을 걷기 시작했다.
저녁은 라지브가 했다.
세눈들개 고기를 큰 냄비에 넣고 두 시간 넘게 끓였다. 양파도 마늘도 없었다. 창고에 있던 카레 가루 한 봉지와 소금, 그리고 라지브가 자기 사물함에서 꺼낸 작은 병 하나. 네팔에서 어머니가 보내 준 향신료라고 했다.
휴게실에 냄새가 퍼졌다. 처음엔 다들 코를 막았다. 한 시간쯤 지나자 아무도 코를 막지 않았다.
라지브가 먼저 한 숟가락 떠먹었다. 다섯이 그 얼굴을 봤다. 라지브는 천천히 씹었다. 삼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염소보다 조금 질깁니다. 근데 괜찮습니다. 맛있습니다."
정우가 두 번째로 떠먹었다. 질겼다. 카레 맛이 났다. 그리고 그 밑에 처음 맛보는 진한 맛이 있었다. 고기였다. 사흘 만의.
보람이 세 번째였고, 센터장이 네 번째였다. 센터장은 한 그릇을 비우고 말없이 두 그릇째를 떴다.
만식이 마지막이었다. 한 숟가락 먹고, 한참 씹다가, 라지브를 봤다.
"…됐다."
라지브가 웃었다. 정우가 본 라지브의 웃음 중에 제일 컸다.
그날 밤 정우는 휴게실 화이트보드 앞에 오래 서 있었다. A-1부터 A-4까지 다시 읽고, 그 밑에 빈칸을 몇 줄 더 그었다.
맨 앞에 B를 적었다.
옆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고 마커 뚜껑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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