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첫 씨앗

닭장 문을 열자 갑순이가 먼저 마당으로 나갔다.

어제보다 걸음이 가볍다.

아직 휘청거리긴 해도 볏짚 위에서 잔 덕인지 깃이 한결 덜 젖어 보였다.

쌀 포대를 들여다봤다.

절반쯤 남았다.

한 줌씩 두 번이면 사람 밥보다 더디게 줄겠지만, 쌀로만 키울 순 없다.

'사료부터 구해야겠네.'

마을길을 따라 읍내 쪽으로 걸었다.

우체통에는 풀이 자라 있었다.

열린 대문 안쪽으로 빈 마당이 들여다보였고, 마루에는 누가 두고 간 슬리퍼 한 짝이 놓여 있었다.

갑순이는 대문까지만 따라오다 서더니 되돌아갔다.

윤씨상회 앞을 지날 때 셔터에 붙은 종이가 바람에 들썩였다.

급한 물건은 2층 벨 눌러 주세요.

급한 물건은 없었다.

나는 종이를 한 번 읽고 지나쳤다.

농협까지는 십오 분이 걸렸다.

자재 창고에는 비료 포대와 사료 포대가 벽을 따라 쌓여 있었다.

계산대에 앉은 직원은 내가 들어서도 고개를 들지 않다가, 닭 사료를 찾는다고 하자 그제야 안경을 올렸다.

"한 마리 먹일 건데요. 작은 포장은 없어요?"

"한 마리요?"

직원이 아래 선반을 열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게 제일 작은 거예요. 소분은 안 하고요."

십 킬로짜리였다.

한 마리한테 몇 년을 먹일 양이다.

읍내 애완동물 가게는 문을 닫았고, 다음 납품이 언제 올지는 직원도 모른다고 했다.

"요즘은 닭 키우는 집이 거의 없어서요."

포대 앞면에 원료가 적혀 있었다.

옥수수 부산물, 쌀겨, 어분.

익숙한 글자들이었다.

손을 얹자 손바닥 안쪽이 묵직해졌다.

서울 현장에서 잔류물이 쌓인 자재를 만졌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검은 기운이 손목을 타고 올라오려 해서, 나는 손을 뗐다.

"이 사료, 정화된 건가요?"

직원이 포대에 붙은 검사표를 훑었다.

"기준치 안쪽이에요. 여기 들어오는 건 전부 검사해요."

표에는 날짜와 숫자가 찍혀 있었다.

현장에서 매일 보던 수치표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기준선 아래에 막대가 얌전히 서 있었다.

'기준 안쪽이면 뭐 해. 내 손은 아는데.'

"다른 사료도 비슷해요?"

"원료 들어오는 데가 비슷해서요. 검사표는 다 붙어 있어요. 그 이상은 저희도 몰라요."

직원이 안경 너머로 내 손을 훑었다. 가죽 장갑 자국이 하얗게 남은 손목이었다.

"서울서 오셨죠? 정화 일 하시던 분 손이네."

"어떻게 아세요?"

"지난달까지 이 동네 정화 나오던 양반들이 똑같이 그렇게 만졌거든요. 만져 보고 인상 쓰고, 안 사 가고."

그러고는 계산대 아래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사려는 게 아니라 그냥 주는 거라고 했다.

직원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포대를 도로 내려놓았다. 여기서 사 가면 사람이 살 수 있는 기준은 넘겠지만, 갑순이한테 먹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 번 만져 본 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씨앗도 있어요?"

"종자요? 저쪽 진열대요."

열무, 상추, 무.

봉투마다 파종 시기와 재배법이 인쇄돼 있었다.

닭이 먹을 잎채소를 키우면 사료 값이 줄 거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 계산이었다.

한 달 월세 걱정을 하던 버릇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상추는 갑순이가 뜯어 먹을 잎이 달리기까지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무는 뿌리를 먹는 작물이고, 뿌리가 굵어질 때까지는 석 달이다.

열무 봉투를 집었다.

뒷면에 '파종 후 한 달 내 수확'이라고 적혀 있었다.

솎아 낸 잎은 갑순이 몫이다.

한 달이면 기다려 볼 만했다.

"이거 하나 주세요."

값은 이천 원이었다.

사료 포대 값의 열 분의 일도 안 됐다.

계산을 마치고 봉투를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나가다 돌아보니 직원이 사료 포대 위의 먼지를 손으로 털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갑순이가 마당 한가운데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문을 열자 봉투를 넣은 주머니 쪽으로 두 걸음 다가왔다.

"이건 씨앗이야. 네가 먹을 건 아니고."

갑순이는 주머니 모서리를 쪼았다. 봉투를 꺼내 높이 들자 포기하고 담장 밑 마른 풀잎을 뒤지러 갔다. 쪼아 보다가 부리로 밀어냈다. 장작더미 아래쪽을 파헤쳐도 나오는 건 없었다.

창고에서 호미를 꺼냈다.

날에 붉은 녹이 얇게 올라와 있었다.

숫돌에 몇 번 문질러 흙을 긁을 만큼만 세웠다.

호미 자루는 손에 설었다. 서울에서 쓰던 장비는 끝이 뾰족했고 쥐는 쪽이 달랐다. 몇 번 쥐었다 놓고서야 손바닥에 앉는 자리를 찾았다.

밭으로 나갔다. 어제 갈색으로 바뀐 고랑 옆에 쟁반만 한 회색 자리가 남아 있었다.

거기부터 한 번 더 정화했다.

손바닥 아래로 검은 기운이 쑥 내려가고, 흙이 갈색으로 돌아왔다. 갈색 흙에 호미를 넣자 날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오래 묵은 흙이 한 덩이씩 들렸다. 덩이는 손으로 부수고, 박혀 있던 자갈은 밭둑으로 던졌다.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겉흙은 가루처럼 흩어졌는데, 깊은 곳은 축축하게 엉겼다.

바깥쪽엔 회색 흙이 그대로였다. 갈색으로 돌아온 자리까지만 걸음으로 재서 표시를 했다.

씨앗 봉투를 뜯기 전에 영농일지를 펼쳤다.

열무 씨는 얇게 뿌림. 흙을 두껍게 덮지 말 것.

뒤쪽 여백에는 손가락으로 그린 듯한 줄 두 개가 있었다.

줄 사이에 점이 찍혀 있고, 옆에는 호미 자국까지 그려 넣었다. 할아버지는 글씨보다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림에 호미를 대 봤다. 내가 낸 고랑이 얕았다. 흙을 한 번 더 끌어 올려 바닥을 평평하게 고쳤다.

발끝으로 줄 사이를 재 가며 고랑을 두 줄 냈다. 팔을 뻗으면 끝까지 닿는 길이였다.

씨앗은 손가락 끝에 조금씩 덜어 뿌렸다.

생각보다 작았다. 바람이 스치자 몇 알이 흙 위로 굴렀다. 쫓아가 줍진 않았다. 첫 줄을 덮고 보니 흙이 두꺼웠다. 일지 그림을 옆에 펴 놓고 손가락으로 걷어냈다. 드러난 씨앗 위에 흙을 한 겹만 흩었다.

두 번째 줄은 처음부터 손등으로 얇게 끌어 덮었다.

손바닥으로 눌러 뭉개지 않고 가장자리만 다독였다.

갑순이가 발치까지 와 있었다.

고랑 위를 쪼려는 부리 앞을 호미 끝으로 막았다.

"그건 네 거 아니야."

갑순이는 호미를 피해 한 걸음 옆으로 가더니 내 운동화 끈을 쪼았다.

운동화 끈을 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끈 끝이 부리 사이에서 달랑거렸다.

그 틈에 반대편 발치에서 사달이 났다.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씨앗 봉투 한 귀퉁이가 찢어져 있었다.

알갱이가 졸졸 흘러 흙 위에 작은 길을 만들고 있었다.

"야."

갑순이가 고개를 돌렸다.

부리가 씨앗 길 쪽으로 곧장 향했다.

"야, 야, 야."

호미를 내려놓고 몸으로 막았다.

갑순이는 내 무릎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알갱이 세 개를 쪼았다.

한 알도 안 남기고 쓸어 모으는 데 오 분이 걸렸다.

손바닥에 모은 알갱이를 입으로 후 불어 흙을 날리고 봉투에 도로 부었다.

갑순이는 밭둑으로 쫓겨나 앉아서 한참을 이쪽을 노려봤다.

쪼인 세 알은 이미 뱃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밭둑에 쓰러진 나뭇가지를 주워 고랑 양쪽에 걸쳤다. 갑순이가 들어와 흙을 헤집지 못하게 하는 정도였다. 끝은 흙덩이로 눌러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했다.

갑순이는 밭둑에 앉았다.

발톱에 볏짚 가루가 묻어 있었다.

해가 한 뼘 기울어 있었다.

점심은 걸렀다. 고랑 두 줄에 한나절이 갔는데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한나절이면 허리부터 나갔다.

밭 끝 우물은 뚜껑이 덮여 있고 손잡이가 붉게 녹슬었다.

내일 물은 저기서 길어야 할 텐데, 저 물이 깨끗한지는 모른다.

뚜껑을 열고 두레박을 내렸다. 올라온 물은 맑아 보였다. 손가락 끝을 담갔더니 손끝이 따끔했다. 부엌 수도에서 나오던 붉은 물보다는 낫지만, 그냥 마실 물은 아니었다.

나는 두레박을 도로 내려놓고 뚜껑을 덮었다. 물은 내일 하루를 더 생각해 봐야겠다.

호미를 털어 창고에 걸고 마루에 앉았다.

흙 묻은 장갑을 벗어 옆에 놓았다.

손톱 밑에 낀 흙을 떼어 내려는데 손톱 끝이 낯설었다.

칠 년 동안 검게 굳어 있던 자리였다.

띵.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파종(播種)]

[씨앗을 알맞은 깊이와 간격으로 심습니다.]

갑순이가 밭둑에서 나뭇가지 울타리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