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관수

눈 뜨자마자 밭부터 내려갔다.

이슬 맺힌 고랑 두 줄은 어제 그대로였다. 갈색 흙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 만에 나올 리 없다는 건 안다. 그래도 한 번은 들여다봐야 했다.

'하루 만에 나면 그건 열무가 아니지.'

갑순이가 뒤따라 내려와 나뭇가지 울타리 앞에서 멈췄다. 목을 쭉 빼고 고랑을 보더니 한 발을 들었다.

"안 돼."

발이 도로 내려갔다. 눈은 고랑에 둔 채였다.

윗흙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어제 물을 줬는데 하룻밤에 다 날아간 모양이었다.

우물로 갔다.

시멘트 뚜껑을 밀고 도르래 손잡이를 돌리자 끼이이익, 녹슨 소리가 났다.

뒤에서 퍼드덕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갑순이가 언덕 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솜뭉치가 풀숲 위에 얹혀서 이쪽을 내려다봤다.

"소리만 그래. 안 문다."

대답은 없었다.

두레박을 올려 양동이에 붓고 한 손을 담갔다.

다른 손은 밭둑 회색 흙에 눌렀다.

손목이 뜨끈해지고 물빛이 한 겹 벗겨졌다.

양동이 하나를 채우는 데 두레박이 열 번쯤 오르내렸다.

어제는 한 통이면 됐는데 오늘은 윗흙이 저렇게 말랐으니 두 통은 줘야 할 것 같았다.

고랑 머리에 서서 양동이를 기울였다.

물이 흙에 닿자마자 쑥 들어가는 걸 보고 속으로 목마른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한 통을 다 붓고 두 통째도 부었다. 흙이 어두운 갈색으로 바뀔 때까지.

그러다 고랑 끝을 봤다.

물이 거기까지 흘러가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열무 씨가 웅덩이 가장자리에 모여 둥둥 떠 있었다.

'…배수 불량.'

고랑 끝으로 걸어가 서서 시작 쪽을 올려다봤다.

눈대중으로도 끝이 한 뼘쯤 낮았다.

양동이를 기울이는 대로 물이 전부 이쪽으로 몰려 내려온 거다.

'구배가 안 맞네. 물을 줄 게 아니라 붙들 걸 먼저 만들어야 했는데.'

호미를 내려놓고 쪼그려 앉아 씨를 한 알씩 집어 제자리로 옮겼다.

모래알보다 작은 게 손끝에 걸렸다. 이게 한 달 뒤엔 밥상에 오른다는 게 영 믿기지 않았다.

등 뒤에서 철벅, 소리가 났다.

돌아봤다.

갑순이가 웅덩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언제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울타리가 있었는데.

"야."

갑순이는 부리로 물을 한 번 퍼 올렸다.

고개를 쳐들고 삼켰다.

한 번 더.

그러다 날개를 활짝 폈다.

푸드덕, 하고 털었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내 얼굴에도 튀었다.

갑순이는 자기가 한 일에 놀랐는지 날개를 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깃이 물을 먹어 착 달라붙었다.

솜뭉치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나는 한참 아무 말도 못 했다.

"…나와."

갑순이가 걸어 나왔다.

걸을 때마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이 젖으니 병아리만 했다.

"그러니까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고랑 얘기였는데 갑순이는 자기한테 한 말인 줄 아는 얼굴이었다.

집에서 수건을 가져와 둘둘 말았다. 부리만 수건 사이로 나왔다.

마루 볕 드는 자리에 놓고 다시 밭으로 갔다.

돌아보면 수건 뭉치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꼭, 하고 작게 울었다.

항의였다.

고랑 끝 웅덩이는 호미로 길을 터서 뺐다.

빠진 자리에는 흙을 긁어모아 낮은 둑을 쳤다.

물이 끝까지 내려가기 전에 걸리도록 손바닥으로 두드려 다졌다.

한 시간이 그렇게 갔다.

밭둑 위에서 자전거 체인이 드르륵 울렸다.

이장이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울타리 너머 고랑을 한 번 보더니 시선이 마루로 갔다.

"총각, 저거 닭 맞죠?"

"네."

"닭을 왜 말아 놨어요."

"…목욕을 했어요."

"어머니도 닭 목욕은 안 시키는데."

이장은 한동안 수건 뭉치를 바라봤다. 수건 뭉치도 이장을 봤다.

"저녁에 쌀쌀해지겠네요. 산바람이 바뀌었어요."

이장은 자전거 짐받이에서 볏짚 한 단을 풀어 밭둑에 내려놓았다.

"닭장 바닥이 얇을 거 같아서. 어르신은 이맘때면 짚을 갈아 줬거든요."

"고맙습니다."

"열무는 사나흘이면 싹 나요. 어르신은 이맘때 해 뜨기도 전에 양동이를 들고 밭머리에 서 있었어요. 꼭 누구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랬어요?"

이장은 대답 대신 고랑 두 줄을 턱으로 가리켰다. "간격은 어르신 거랑 똑같네요."

일지 그림대로 냈을 뿐인데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감자는 더 있으니까 말하고요."

이장은 그 말만 하고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짚단을 닭장 앞으로 옮겼다. 묶인 끈을 풀어 바닥에 깔아 주려다 갑순이가 젖은 채로 들어가면 다 눅눅해진다는 생각에 그만뒀다.

마르면 깔기로 하고 마루로 돌아왔다.

식은 감자를 한 알 꺼내 먹으면서 영농일지를 펼쳤다. 물 주는 법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올해 공책에는 없었다. 재작년 공책 가을 쪽에 있었다.

열무는 해 뜨기 전에 한 번. 해 진 뒤에 한 번. 한 번에 많이 말고 나눠서.

고랑 끝에 물 고이면 씨 썩음. 흙 눌러 보고 손등에 붙어 나오면 됐다.

그 아래에는 양동이 그림이 있었다.

양동이가 반쯤 기울어 있고 화살표 옆에 글씨가 붙어 있었다.

이만큼.

'각도까지 그렸네.'

감자를 다 먹고 수건 옆에 앉았다.

"한 통이면 됐는데."

갑순이가 수건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내가 틀렸어."

그제야 부리가 조금 풀렸다. 풀린 건지 졸린 건지는 모르겠다.

해가 기울기 전까지는 정화를 했다.

어제 낸 쟁반 옆으로 한 자리씩 옮겨 앉았다.

손바닥을 대면 쑥 내려가고, 조용해지고, 한 뼘 옆으로 간다.

무릎이 어제보다 덜 아팠다.

갈색으로 돌아온 자리가 울타리 쪽으로 조금씩 번졌다.

수건에서 빠져나온 갑순이가 마루에서 내려와 새 갈색 자리를 돌아다녔다.

한 걸음마다 목을 숙여 땅을 살폈다.

회색 흙 앞에서는 딱 멈췄고 한 발도 넘어오지 않았다.

'…출입 통제선은 철저하네.'

내가 쟁반 하나를 끝낼 때마다 갑순이가 와서 새 자리를 한 번 밟아 보고 갔다.

허락을 받는 기분이었다.

불합격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해가 기울고 나서 다시 우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도르래 소리가 나도 갑순이가 도망가지 않았다. 마루에서 수건에 말린 채 눈만 끔벅였다.

두레박 열 번.

한 손은 물에, 한 손은 흙에.

양동이 하나만 채웠다.

고랑 머리에 서서 양동이를 반만 기울이고 호미 등으로 물줄기를 받아 얇게 흘렸다. 흙이 물을 한 모금씩 마시면 윗흙이 어두워졌고, 그러면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고랑 끝까지 가도 웅덩이는 생기지 않았다.

손등으로 흙을 눌러 봤다. 흙이 손등에 붙어 나왔다.

됐다.

띵.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관수(灌水)]

[작물에 알맞은 양의 물을 알맞은 때에 줍니다.]

물이 스며든 자리가 해가 졌는데도 마르지 않았다. 윗흙이 물기를 붙들고 있는 것처럼 어두운 갈색으로 반짝였다.

나는 양동이를 든 채 한참 서 있었다.

'스킬이 늦은 게 아니라 내가 늦었네.'

저녁을 먹기 전에 닭장부터 손봤다.

이장이 준 볏짚을 바닥에 두껍게 깔고, 창고에서 찾은 헌 포대를 철망 아랫단에 둘러 철사로 얽었다.

바람이 새는 데는 눈으로 찾는 것보다 손등을 대 보는 게 빨랐다.

손등에 서늘한 게 닿는 자리마다 포대를 한 겹씩 더 덧댔다.

새로 깐 짚 위에서 갑순이가 한참 발로 헤집어 보더니 마음에 안 드는지 도로 펴 놓고 가운데에 앉았다.

저녁은 컵라면이었다.

마루에 앉아 먹는 동안 수건에서 풀려 나온 갑순이가 내 발치를 한 바퀴 돌았다. 깃이 다 말라서 낮보다 한 단계 더 부풀어 있었다.

해가 지자 이장 말대로 바람이 달라졌다.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찬 기운이 섞여 있어서 점퍼를 하나 더 꺼내 입었다.

닭장 문을 닫으며 "잘 자." 했더니 대답처럼 꼭, 하고 울었다.

방에 들어가 이불 속에 누웠는데 잠이 안 왔다.

뒤뜰이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갑순이 안 자나.'

랜턴을 들고 나가 철망에 불빛을 비추니 갑순이는 닭장 구석에 있었다. 깃을 있는 대로 부풀려서 평소 두 배는 돼 보였고, 머리는 날개 밑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솜뭉치가 한 단계 더 솜뭉치가 되어서 가늘게 떨고 있었다.

"갑순아."

대답이 없었다. 부푼 깃이 한 번 더 바르르 떨렸다.

문을 열고 손을 넣었다. 깃털 겉은 빳빳한데 속은 차가웠다.

바닥에는 짚이 두툼하고 철망 아랫단까지 막아 놨는데도 갑순이는 떨고 있었다.

두 손으로 떠서 올렸다.

저항하지 않았다.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방으로 안고 와 일지를 폈다. 닭 얘기만 모아 둔 작년 공책 맨 뒤쪽에 있었다.

첫 찬 밤에는 약한 놈을 방에 들여 재움.

더운물 병은 양말에 싸서 곁에 둘 것.

병아리는 사람이 품어 주면 제일 빨리 풀림.

병아리 얘기였다. 갑순이는 병아리가 아니다.

그런데 이 크기에 이 떨림이면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시키는 대로 하자.'

부엌에서 물을 데워 빈 페트병에 붓고 양말 한 켤레에 넣었다. 방 한구석에 상자를 놓고 짚을 깔아 양말 병을 한쪽에 눕힌 다음, 그 옆에 갑순이를 내려놓았다.

갑순이는 몸을 한 번 말았다가 도로 풀었다. 떨림은 그대로였다.

상자 옆에 누웠다. 갑순이는 양말 병은 쳐다도 안 보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거기 있으라니까."

갑순이는 이불 가장자리를 부리로 들췄다.

"…알았어."

이불을 들어 주자 안으로 들어와 턱 밑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열 살 때 이 방에서 추워 떠는 나를 할아버지는 말없이 이불 끝을 들어 줬다. 그때는 그냥 들어갔다.

'할아버지도 이렇게 닭을 품고 잔 적이 있을까.'

일지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손바닥으로 등을 덮었다.

작았다.

가벼웠다.

심장이 엄청나게 빨랐다.

갑순이가 겨드랑이 쪽으로 파고들었다.

깃털이 코끝을 스쳤다.

참으려다가 에취, 하고 크게 재채기가 나왔다.

갑순이가 이불 밖으로 튀어나갔다.

바닥에 내려서서 한참 나를 쳐다봤다.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이불을 다시 들어 주자 갑순이는 한 번 더 고민하더니 도로 들어왔다.

'…이거 당직이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면 어쩌나 하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이 떠졌다.

가슴 위가 이상했다.

규칙 없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내 숨이 아니었다.

쌕, 쌕, 쌕.

손바닥으로 갑순이를 감싸 쥐고 일어나 앉았다.

갑순이는 부리를 반쯤 벌리고 있었다.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올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닫히지 않는 부리 사이로 숨이 얕게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