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평
새벽에 밭으로 내려가다 고랑 앞에서 발이 멈췄다.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이슬 맺힌 고랑 두 줄에 연둣빛 점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쪼그려 앉아 들여다봤다.
손톱 반쪽만 한 잎 두 장이 흙을 밀어 올린 채 아직 서로 붙어 있었다. 이쪽 줄에도, 저쪽 줄에도.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사나흘이라며.'
씨를 묻은 지 이틀도 안 됐다.
일지 그림처럼 간격도 같았다. 한 알도 쏠리거나 겹치지 않고 자로 잰 듯이 났다.
손가락 끝으로 싹 하나를 건드려 봤다.
줄기가 빳빳하게 서 있었고 거기서 이슬이 한 방울 굴러 떨어졌다.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갑순이가 울타리 틈으로 목을 빼고 고랑을 보고 있었다.
"안 돼."
갑순이는 한 발 들었다가 내렸다.
눈은 연둣빛에서 안 떼고 있었다.
"…나도 알아. 신기하지."
대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보람이었다. 이번에는 갑순이가 알아채고 꼭꼭 울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찍 나왔어요. 가게 열기 전에 닭 좀 보려고."
"싹이 났어요."
"네?"
보람이 밭둑으로 달려왔다.
고랑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벌써요? 저희 할머니 텃밭 열무는 싹 나는 데 일주일 걸렸는데."
"사나흘이라고 들었는데요."
"사나흘도 빠른 거예요. 이건 이틀…"
"…일지대로 했을 뿐입니다."
"일지대로만 하면 이렇게 나요?"
대답하지 못했다.
일지대로 한 건 맞는데 일지에 이런 말은 없었다. 보람은 싹 하나를 가만히 건드려 보다가 나를 올려다봤다.
"태환 씨, 이거 어르신이 키우던 열무랑 같은 거예요?"
"종자는 농협에서 이천 원 주고 샀어요."
"이천 원이요?"
"네."
"…이천 원."
보람은 그 말을 몇 번 되풀이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물은 아침저녁으로 줬다.
두레박 열 번, 양동이 하나. 한 손은 물, 한 손은 흙.
보람은 우물가에서 그걸 구경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거 안 힘들어요?"
"힘든데, 하다 보면 요령이 생겨요."
"무슨 요령이요?"
"물은 위에서부터 층이 져서 맑아져요. 처음엔 손을 깊이 넣지 말고 표면에서 천천히 끌어내려야 하고, 손목에 열이 오르면 흙 쪽 손으로 한 번 빼 줍니다. 거기서 참으면 다음 통이 안 나가요. 그리고 양동이는 반만 채우는 게 좋아요. 가득 채우면 걷다가 반은 흘려요."
보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태환 씨, 이런 얘기는 말이 많아지시네요."
"…일 얘기라서."
"갑순이 얘기하실 때는 짧던데."
그 말에는 할 대답이 없었다.
물을 준 뒤에는 정화를 했다. 이틀 전에 호미로 표시한 선 바깥에서부터 쟁반을 이어 붙였다.
위쪽 모서리에서 시작해 뒤로 물러나며 했고, 발은 늘 회색 쪽에 두어 갈색이 된 자리를 밟지 않았다.
보람은 밭둑에 앉아 보리차 병을 무릎에 올려놓고 갑순이와 함께 나를 구경했다.
"열 평이 어느 정도예요?"
"이 정도요."
나뭇가지 두 개를 땅에 꽂고 걸음으로 재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가지를 꽂았다.
사각형이 생겼는데 생각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작네요."
"쟁반으로 하면 백 번 남짓이에요."
"백 번이요?"
"한 번에 한 쟁반이니까요."
"그걸 오늘 다 하세요?"
"오늘은 못 합니다. 이틀은 걸려요."
보람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밭 전체는요?"
"구백 평이요."
"그래서 한 칸씩 합니다."
작업 순서는 오래 걸리지 않고 섰다.
가지 사이에 끈을 쳐서 구역을 나누고, 위쪽 칸부터 번호를 붙였다. 두 칸씩 붙이면 하루에 한 구역.
순서가 서자 마음이 편해졌다.
"A 구역은 위쪽 두 칸이고요."
"A 구역이요?"
"…첫 번째 두 칸이요."
보람은 웃음을 참느라 보리차를 급하게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
갑순이가 무릎 위에서 깜짝 놀라 일어났다.
'…입이 먼저 나갔네.'
점심때쯤 보람이 종이봉투에서 주먹밥을 꺼냈다.
할머니가 아침에 눌러 준 거라고 했다. 하나는 보람이, 하나는 내가, 부스러기는 갑순이가 먹었다.
주먹밥은 간이 딱 맞았다.
입에 넣고 한참 씹었다. 이런 걸 먹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났다.
"맛있어요?"
"…네."
"할머니가 열무김치 담글 때 쓰는 소금으로 간한 거예요. 요즘은 열무가 없어서 못 담그시지만."
"그러세요."
더 말하지 않았다.
보람도 더 말하지 않았다. 갑순이가 보람 무릎에서 내 무릎으로 옮겨 앉았다.
처음이었다.
'…이쪽도 한 번은 앉아 주네.'
그날 오후부터 정화를 다시 했다.
이틀은 정화만 했다. 쪼그려 앉아 손바닥을 대고, 쑥 내려가는 걸 느끼고, 한 뼘 옆으로 옮겨 앉는다.
끈으로 나눈 칸이 하나씩 갈색으로 채워졌다.
첫날 저녁에는 허리가 아팠고 둘째 날 저녁에는 무릎이 아팠는데, 셋째 날 아침에는 둘 다 괜찮았다. 그 사이에도 물은 아침저녁으로 줬다.
고랑 끝에 쳐 놓은 흙둑이 제 몫을 했다.
웅덩이는 한 번도 생기지 않았다. 사흘째 오후에 손바닥 밑이 달라졌다.
한 번 대면 쟁반이 아니라 쟁반 하나 반이 갈색으로 변했다.
띵.
[부숙 — 숙련 20]
[숙련이 20을 넘었습니다. 한 번에 닿는 넓이가 늘어납니다.]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흙 묻은 손바닥은 어제나 오늘이나 같았다. 어깨 너머에서 숨소리가 났다.
갑순이가 방금 갈색이 된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 아직 안 돼."
갑순이는 발끝만 살짝 넣어 보고 도로 뺐다.
"…합격."
저녁에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구태환]
[등급: F]
[보유 스킬]
[기초 정화(F) — 숙련 72]
[부숙(고유) — 숙련 20]
[파종 — 숙련 6]
[관수 — 숙련 9]
[신체]
[체력 — 숙련 4]
[근력 — 숙련 3]
처음 보는 칸이 둘 늘어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생겼대.'
체력과 근력.
이런 칸이 있는 줄도 몰랐다. 숙련 4.
보잘것없는 숫자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근력 3은 너무 정직하네.'
창을 닫았다.
넷째 날 아침에 열 평이 끝났다.
사각형 안의 흙이 전부 갈색이었다. 끈으로 나눈 칸마다 호미 날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며칠 전까지 회색이던 땅이 이만큼 열려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열무가 먼저 알려 줬다. 고랑 두 줄이 어느새 한 뼘이었다.
잎이 손바닥만 하게 펴져 있었다.
이슬을 구슬처럼 얹은 진한 초록이 아침볕에 반짝였다. 줄기는 내 새끼손가락보다 굵었다.
사흘 전에 싹이 났는데 지금 잎이 제법 열무 꼴이었다.
장터에서 파는 것보다 잎이 두꺼웠다.
'…이건 열무가 아니라 뭐 다른 거 아닌가.'
갑순이가 울타리 앞에 서서 열무를 올려다봤다.
높이가 닭 눈높이와 거의 같았다.
"안 돼."
갑순이가 대답 없이 돌아서서 갈색으로 바뀐 사각형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자리에서 한 발을 넣고 다음 발을 넣었다. 발끝에서 멈칫하더니 갑자기 한쪽 구석에 쪼그려 흙을 헤집었다.
한 번, 두 번.
그러더니 몸을 낮추고 갈색 흙 위에 털썩 앉았다. 날개를 펴고 몸을 흔들며 흙을 끼얹었다.
하얗던 솜뭉치가 순식간에 먼지 구름으로 바뀌어 보이지 않았다.
"야, 야. 갑순아."
갑순이는 대답 없이 흙을 한 번 더 끼얹었다.
갈색 가루가 아침 햇빛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구르르, 하는 소리가 났다.
보람이 말한 대로 닭이 좋을 때 내는 소리였다.
일지에 있었던 것 같아서 가서 확인해 보니 정말로 있었다.
갑순이 아침마다 흙 목욕. 모래 없으면 재라도.
그 아래에 그림이 있었다.
솜뭉치 하나가 땅에 누워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거 목욕이 맞습니까.'
갑순이는 흙투성이로 일어났다.
하얗던 솜털이 연한 갈색이 되어 있었다. 몸을 크게 털자 흙이 사방으로 날려 내 바지에도 앉았다.
"…고맙다."
갑순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람이 대문으로 들어온 건 그때였다. 갑순이를 보더니 문 앞에 서서 한참 아무 말도 못 했다.
"…귀여워."
"흙 목욕이요."
"귀여워."
"일지에 나와 있어서."
"귀여워, 귀여워, 귀여워."
보람은 아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갑순이는 보람 쪽으로 걸어와 한 번 더 몸을 털었다. 보람의 후드티에 흙이 떨어졌다.
보람은 그걸 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태환 씨, 이 정도면 사진 찍어도 돼요?"
"저한테 허락 안 받으셔도."
"갑순이한테 받아야죠."
보람이 휴대폰을 들자 갑순이가 렌즈를 쳐다봤다.
고개를 갸웃했다. 찰칵.
보람은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나한테 보여 줬다.
흙투성이 솜뭉치가 갸웃한 얼굴로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이거, 올려도 돼요?"
"어디에요?"
"그냥… 제 계정이요."
"…그러세요."
보람은 화면을 몇 번 눌러 보다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올린 건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열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태환 씨. 열무 말이에요."
"네."
"할머니 텃밭 열무는 이거 키우는 데 한 달 걸렸어요. 한 달 키운 거랑 지금 이게…"
"…"
"같은 열무예요?"
나는 열무를 한참 내려다봤다.
이슬이 잎 위에서 한 번 굴렀다.
"이천 원짜리 씨입니다."
"그건 아까도 들었어요."
그 이상은 나도 몰랐다.
밭둑 위에서 자전거 체인이 드르륵 울렸다. 이장이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짐받이에서 신문지 꾸러미를 풀다가 고랑을 보더니 손이 멈췄다.
"…총각, 이게 며칠 된 거예요?"
"나흘이요."
"열무가요?"
"네."
이장은 꾸러미를 든 채 밭둑을 내려와 열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잎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뒤집어 보고 줄기를 눌러 보고 코에 대 보았다. 한참 그러더니 신문지 꾸러미를 도로 짐받이에 올려놓았다.
"어르신도 이렇게는 못 키웠는데."
"…물을 반 통씩 줬어요."
"반 통이요."
"네."
"비료는요."
"거름만 넣었습니다."
이장은 대답이 없었다.
열무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갑순이를 봤다. 흙투성이 갑순이가 이장을 마주 봤다.
"…감자는 내일 가져올게요."
이장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다가 두 번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