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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열네 장

"제1조. '갑'은 '을'의 헌터 활동 일체를 매니지먼트한다. 근데 여기 '활동 일체'가 '활동 일채'로 돼 있어요."

"…그건 오타 맞네요."

도윤이 볼펜을 꺼내 그 글자를 고치는 사이, 태하는 이미 다음 줄을 읽고 있었다.

오후 1시, 말순 PC방 카운터 옆 테이블이었다. 오말순은 카운터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척하며 귀를 이쪽으로 열어 두고 있었다. 가게 안의 손님 여섯 명은 각자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정류장 영상은 이미 조회수 8만을 넘겼지만, 이 가게 안에서 그걸 본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다.

태하는 계약서를 읽는 방식이 특이했다. 한 줄을 읽고, 손가락으로 짚고, 앞 페이지로 돌아갔다가, 다시 그 줄로 왔다. 같은 단어가 다른 조항에 나오면 두 군데를 번갈아 봤다.

"원래 그렇게 읽어요?"

"패치 노트 읽을 때 이렇게 읽어요. 개발사가 너프를 몰래 숨겨 놓거든요. 앞에서는 버프라고 해 놓고, 뒤에 '단, 일부 조건에서'라고."

도윤은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 전생에서 이 녀석이 제우스 계약서를 이렇게 읽었다면, 7년짜리 노예 계약에 사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태하는 계약서를 읽지 않았다. 할머니 가게 유리값이 급했으니까.

제3조에서 태하의 손가락이 멈췄다.

"수익 배분. '을' 70, '갑' 30."

"네."

"을이 저예요?"

"네."

"제가 70이요?"

"네."

태하가 고개를 들었다. 1시간 전 정류장 앞에서보다 더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상하잖아요."

"뭐가요."

"아저씨가 다 하는 거잖아요. 사람 비키게 하고, 고깔 세우고, 음료 사 주고. 근데 저한테 70을 줘요?"

"태하 씨가 싸우는 거니까요."

"게임 회사도 그렇게 안 줘요. 프로팀도 선수한테 그렇게 안 줘요."

태하가 프로팀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아졌다. 도윤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전생에 인터뷰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열아홉 살 때 태하는 프로게임단 입단이 확정됐는데, 데뷔전을 2주 앞두고 스폰서가 빠지면서 팀이 해체됐다. 계약서에는 '팀 해체 시 계약 자동 종료'라는 한 줄이 있었고, 위약금도 보상도 없었다. 그 뒤로 태하는 랭킹 1위를 몇 년이나 지켰지만 다시는 어떤 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도윤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직 아는 척할 때가 아니었다.

"사기꾼은 원래 앞에서 잘해 줘요. 그거 아시죠?"

"알아요."

"그러니까 이상하다고요."

도윤은 볼펜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럴듯한 설명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없었다.

"…저도 계약서 이런 거 잘 몰라요. 매니저 10년 하면서 계약서는 늘 회사 법무팀이 썼거든요. 이건 어젯밤에 인터넷에서 표준계약서 양식 받아서 밤새 고친 거예요. 아는 건 하나밖에 없어요. 제가 본 나쁜 계약서들은 다 선수가 손해 보게 돼 있었어요. 그래서 반대로 쓴 거예요."

"…그게 다예요?"

"그게 다예요."

태하는 미심쩍은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다.

제5조에서 태하가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의심보다 어이없음이 앞선 얼굴이었다.

"'을'의 활동 시간은 1일 8시간, 주 5일을 초과할 수 없으며, '을'이 원할 경우에도 '갑'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네."

"제가 원해도 안 된대요."

"네. 그건 꼭 넣고 싶었어요."

"…왜요?"

도윤은 대답 대신 다음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태하가 읽었다.

"'을'은 공복 상태로 게이트에 진입할 수 없다. 수면 6시간 미만인 날은 활동을 쉰다. 활동 후 48시간 이내에 '갑'이 지정한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다. 비용은 '갑'이 부담한다."

태하가 고개를 들었다. 키보드 옆에 쌓여 있던 빈 에너지 드링크 캔 다섯 개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이거 저 겨냥해서 쓴 거죠."

"전 국민 겨냥해서 쓴 거예요. 태하 씨가 첫 번째일 뿐이고."

전생에서 도윤이 마지막으로 본 업계 뉴스는 제우스 소속 A급 헌터 셋이 같은 주에 과로로 쓰러졌다는 기사였다. 셋 다 그 주에 게이트를 열네 번 들어갔다. 회사는 '본인의 강한 의지'라고 해명했다. 도윤은 그 해명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았다.

"…그냥, 그렇게 쓰러지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서요."

태하는 대꾸하지 않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넘기기 전에, 그 조항 옆 여백에 손톱으로 작게 금을 하나 그었다. 나중에 다시 볼 곳이라는 표시였다.

제9조는 계약 해지에 관한 조항이었다.

"'을'은 언제든지 서면 통보로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위약금은 없다."

태하가 그 줄을 세 번 읽었다. 앞 페이지로 돌아갔다가, 다시 왔다. 단서 조항을 찾는 눈이었다.

"…단서가 없네요."

"없어요."

"'단, 일부 조건에서'가 없어요."

"…그거 넣어야 되는 거예요?"

도윤이 진지하게 물었다. 태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도윤을 쳐다봤다.

"넣지 마요."

"네."

"아니, 그럼 아저씨 이득은 어디 있어요? 제가 아무 때나 나가도 되면."

"30이요."

"사무실도 없으면서 30으로 뭐 해요."

"…그러게요."

도윤은 웃었다. 진짜로 대답이 없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전생의 제우스는 강태하 이름 하나로 7년 동안 헌터 200명을 끌어모았고, 그 200명 중 절반은 3년 안에 다쳐서 은퇴했다. 도윤이 아는 건 그 숫자뿐이었다. 그 반대로 하면 뭐가 남는지는, 해 보기 전엔 몰랐다.


마지막 장까지 읽는 데 1시간 40분이 걸렸다. 태하는 오타를 일곱 개 더 찾아냈고, 도윤은 그걸 전부 고쳤다. 오말순은 그동안 컵라면 두 개를 끓여서 테이블에 놓고 갔다. 하나는 태하 앞에, 하나는 도윤 앞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하는 계약서를 덮고 그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읽었어요."

"네."

"안 해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미팅에서 예상할 수 있는 가장 흔한 대답이었다.

"이유 물어봐도 돼요?"

"귀찮아요."

"그거 말고 진짜 이유요."

태하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컵라면 뚜껑 틈으로 김이 올라왔다. 카운터에서 계산기 소리가 멈췄다.

"…아저씨 말대로 그 구멍 같은 게 계속 생긴다 쳐요. 그럼 그거 막는 사람도 계속 필요하겠죠. 근데 그게 왜 저예요? 저보다 운동 잘하는 사람 많잖아요. 군인도 있고, 경찰도 있고."

"태하 씨가 제일 셀 거라서요."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12시 14분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태하가 입을 다물었다. 도윤이 컵라면 뚜껑을 열자 면이 적당히 불어 있었다.

"근데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

"세게 될 거라는 거, 태하 씨는 별로 안 궁금하잖아요. 1위는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

태하가 고개를 숙였다. 후드티 끈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

"…열심히 했다가 없어지는 거, 그거 별로예요."

목소리가 작아서 카운터까지는 안 들렸을 것이다.

도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고, 이번엔 웃지 않았다.

"…없어지면요. 저도 없어질 수 있어요. 회사도 없는 사람이니까."

도윤은 계약서 뒷장을 뒤적였다. 어젯밤 새벽 4시쯤 쓴 조항이 어디 있었는데. 태하가 먼저 제15조를 찾아냈다.

"'갑'의 사업이 중단될 경우, '갑'은 '을'의 이적을 위한 비용 일체를 부담하며, 그때까지의 미지급 수익을 즉시 정산한다."

태하가 읽고 나서 도윤을 봤다.

"이거 보통 반대로 쓰는 거 알아요? 회사 망하면 선수가 손해 보는 걸로."

"…그래요? 몰랐어요. 그냥 제가 망하면 제가 물어내는 게 맞는 것 같아서."

태하는 그 조항을 오래 봤다. 손가락으로 짚지도 않고, 앞 페이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도윤은 그쯤에서 밀어붙이지 않기로 했다. 10년 동안 연습생을 캐스팅하면서 첫 미팅에 사인까지 받아 낸 건 두 번뿐이었고, 그 둘은 석 달을 못 버티고 나갔다.

대신 그는 수첩을 꺼내 오늘 아침 쓰지 않았던 줄을 펼쳤다.

"태하 씨. 하나만 더 말할게요. 이건 내기 아니에요."

"…뭔데요."

"3주 뒤에요. 4월 30일. 오후 4시쯤."

도윤은 창밖을 가리켰다. 창문 너머로 PC방 앞 사거리가 보였다. 순댓국집, 휴대폰 대리점, 횡단보도, 신호등.

"저기, 사거리 한가운데에 하나 열려요. 오늘 정류장 거보다 커요.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게 이 건물 1층 유리창을 깨요."

태하의 손이 멈췄다.

"그 위가 여기예요."

태하가 고개를 돌려 카운터를 봤다. 오말순이 돋보기를 쓰고 계산기를 보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계산기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쪽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할머니한테 가게 닫으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날만."

"할머니가 닫으실까요?"

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말순은 설날에도 가게를 열었다. 작년 여름 장마에 1층이 잠겼을 때도 2층은 열었다.

"그리고 그날 하루 닫아도요. 그다음 주에 또 열려요. 그다음 달에도. 여기만이 아니라 서울 전체에요. 피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서요."

도윤은 수첩을 덮었다.

"저는 그날 저 사거리에 태하 씨가 서 있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 대신."

태하는 오랫동안 창밖을 봤다. 사거리 신호가 초록에서 빨강으로, 다시 초록으로 두 번 바뀌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거, 할머니한테 직접 말해요."

"네?"

"3주 뒤에 저기 열린다는 거요. 할머니가 믿으면 할게요."

도윤은 카운터를 봤다. 오말순이 마침 고개를 들었다. 돋보기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뭘 보노, 총각. 컵라면값은 따로 받는데이."

도윤은 지갑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들고 일어섰다. 아까 정류장 영상을 보고 할머니가 한 말은 '진짜네' 한마디였다. 신기하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컵라면값이요. 그리고 사장님, 오늘 밤에 장부 쓰실 때 10분만 주세요."

오말순이 천 원짜리 두 장을 받아 돈통에 넣었다.

"10분이면 그것도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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