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커피
시온 아르덴이 크로웰 저택을 다시 찾은 것은 상견례 이틀 뒤의 오전이었다. 약혼자는 정해진 날이 아니어도 예고 쪽지 한 장이면 저택을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사교계의 관례였고, 그는 그 관례를 처음으로 고맙게 여겼다. 쪽지에는 영애와 정원을 걷고 싶다고 적었으나, 정원보다는 그 정원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응접실은 높은 천장과 긴 창과 금박 액자 속의 조상들까지 이틀 전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오늘은 공작도 공작부인도 없었고, 집사 클로드가 영애께서 곧 내려오신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간 뒤로는 시온 혼자였다.
그는 앉지 않고 창가에 섰다. 창밖으로 마구간 지붕과 세탁실 굴뚝, 그리고 하인들이 드나드는 뒷문이 내려다보였다. 이 시각 뒷문을 드나드는 사람은 장바구니를 든 주방 하녀와 장작을 진 사내아이, 그리고 빨래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중년 여인까지 셋이었다. 시온은 그들의 얼굴과 동선을 수첩에 적었다. 여섯 명이 죽었다면 그 여섯 번 모두 이 저택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들고 나갔을 것이다.
"기사님! 커피 드신다고 하셔서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이 응접실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밝았다.
돌아보니 하녀 한 명이 은쟁반을 받쳐 든 채 문간에 서 있었다. 갈색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렸고, 앞치마 끈은 등 뒤에서 커다란 나비 모양으로 매여 있었다. 상견례 날 영애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시녀였는데, 그날은 이름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집사님이 기사님께 차를 내라고 하셨는데요, 기사님이 차 말고 커피를 드신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이 집은 다들 차만 드셔서 커피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주방 찬장 맨 위 칸을 다 뒤졌거든요? 그랬더니 작년에 남부 상인이 놓고 간 원두가 한 봉지 있더라고요! 제가 직접 갈았어요!"
시녀는 그 말을 숨 한 번에 다 하고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쟁반을 들어 보였다. 은주전자 주둥이에서 진한 김이 피어올랐다. 시온은 커피를 청한 적이 없었다. 다만 클로드가 차를 권했을 때 괜찮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 거절이 저택의 계단과 복도를 거치는 사이에 커피를 원한다는 말로 바뀐 모양이었다.
평민 출신 기사가 귀족 저택에서 차를 거절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을, 그는 오늘 처음 알았다.
"…고맙네."
"헤헷, 아니에요. 아가씨 약혼자분이시잖아요. 앉으세요, 앉으세요!"
시녀는 쟁반을 들고 소파 앞 낮은 탁자로 종종걸음을 쳤다. 그리고 탁자 앞에 깔린 두꺼운 양탄자의 접힌 모서리에 정확히 발끝이 걸렸다.
시간이 아주 조금 느려지는 듯하더니 시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고, 쟁반이 손을 떠났으며, 은주전자가 공중에서 반 바퀴를 돌았다. 시온은 기사의 반사 신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 넘어지는 시녀의 팔꿈치를 붙잡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주전자까지 붙잡을 손은 없었다.
진한 갈색의 커피가 왕실 기사단 정복의 왼쪽 허벅지 위로 쏟아졌다.
뜨거웠으나 시온은 소리를 내지 않았고, 다만 이를 아주 조금 악물었을 뿐이었다.
"아아아앗! 기사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시녀는 붙잡힌 팔을 빼내자마자 앞치마를 풀어 시온의 허벅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드릴수록 얼룩은 넓어지기만 하였고, 은쟁반은 양탄자 위를 굴러 소파 밑으로 들어갔고, 찻잔 하나가 탁자 모서리에서 떨어져 손잡이가 깨졌다.
"뜨거우시죠? 뜨거우시죠! 어떡해, 이거 기사단 옷이죠? 비싼 거죠? 제 월급으로 갚을 수 있어요? 몇 달 치예요?"
"괜찮네."
"안 괜찮으세요! 얼굴이 빨개지셨어요!"
"…괜찮네."
시온은 시녀의 손목을 붙잡아 두드리기를 멈추게 하였다. 문장이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는데, 당황하면 늘 그렇게 되는 것이 그의 오래된 약점이었다. 범인과 칼을 맞대고 있을 때도 이 정도로 짧아지지는 않았다.
복도 끝 계단참에서 아델라이드 크로웰은 그 소리를 들었다. 은쟁반이 굴러가는 소리, 찻잔 깨지는 소리, 그리고 비비의 목소리. 비비가 무언가를 쏟았을 때 나는 소리는 비비가 앞치마를 처음 두른 열두 살 무렵부터 들어 왔으니 굳이 응접실 문을 열어 보지 않아도 어떤 광경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는 대신 난간 뒤에 잠시 멈추어 섰다. 열린 응접실 문틈으로 기사의 옆얼굴이 보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채 비비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는데, 그 붉은 얼굴과 달리 다른 손은 이미 허리춤의 수첩을 확인하고 있었다. 커피에 젖지 않았는지를.
옷보다 수첩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군.
그렇다면 그 수첩에 쓸 만한 것이 들어 있다는 뜻이지.
아델은 드레스 자락을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응접실 문 앞에서는 걸음을 조금 빨리 하고 숨을 조금 가쁘게 만들었다. 소란을 듣고 놀라서 뛰어온 영애처럼 보이도록.
"비, 비비…! 무슨 일이야?"
"아가씨! 제가요, 제가 기사님한테 커피를…!"
비비가 울상이 되어 돌아섰다. 시온 아르덴이 비비의 손목을 놓고 몸을 바로 세웠다. 커피에 젖은 허벅지를 가리려는 듯 손을 그 위에 얹었다가, 그것이 더 우스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도로 내렸다.
"영애.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 일이 아닌 것 같지 않은데요…."
아델은 그의 정복 위로 번진 얼룩을 보았다. 왼쪽 허벅지에서 무릎까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였다. 기사단 정복은 짙은 감색 모직이었다. 커피는 모직에 스며들면 잘 빠지지 않는다.
"세, 세탁실에 가시면… 찬물이 있어요. 지금 바로 헹구시면 얼룩이 덜 남을 거예요. 클로드에게 안내하라고…."
"제가 할게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제가 쏟았으니까요!"
비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시온은 잠시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아델은 그 망설임의 정체를 알았다. 하녀가 왕실 기사를 하인들의 세탁실로 데려간다는 것은 귀족 저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수사관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부탁하네."
시온이 짧게 말했다.
시온이 안내받은 세탁실은 저택 서쪽 끝 반지하에 있었다. 하인 전용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시녀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시온은 그 수다를 흘려들으며 계단의 개수와 복도의 갈림길과 문마다 걸린 명패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주방, 식료품 창고, 하녀장실, 은그릇 보관실, 그리고 세탁실.
"아가씨는요, 원래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세요. 책을 읽으시느라고요. 동관 이 층 끝 방이 아가씨 서재인데요, 거기 불이 새벽까지 켜져 있을 때가 많아요. 제가 따뜻한 우유를 갖다드려도 반은 남기시고요."
"그런가."
"그리고 아가씨는 무도회를 진짜 싫어하세요. 다음 주 랑베르 후작가 무도회도 안 가고 싶어 하시는데, 공작부인 마님이 꼭 가야 한다고 하셔서요. 셀린 아가씨 혼처 알아보는 자리라 아가씨가 빠지면 사람들이 또 뭐라고 할 거라고요."
시온의 걸음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공작부인께서 영애를 무도회에 꼭 보내신다고."
"네! 마님은요, 체면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그 일들 있을 때마다 조화(弔花)도 제일 크게 보내셨어요. 여섯 번 다요. 저번엔 베르텔 댁에 백합을 한 수레나 보내셔서 성당 입구가 막혔대요."
시녀는 깔깔 웃었으나 시온은 따라 웃지 않았다. 의붓딸의 약혼자가 죽을 때마다 가장 큰 조화를 보낸 계모를 체면으로 읽어야 할지 다른 무엇으로 읽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그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다.
세탁실의 찬물 대야 앞에서 시녀는 그의 정복 바짓단을 걷어 올리는 시늉을 하다가, 시온이 손을 들어 막자 그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깨닫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시온은 세탁실 구석 칸막이 뒤에서 하인용 바지로 갈아입었고, 시녀는 그의 정복을 찬물에 담가 비누 없이 손으로 주물렀다. 찬물에 몇 번을 헹구고 나서야 커피 얼룩은 겨우 반쯤 빠졌다.
그동안 시온은 칸막이 틈으로 세탁실 벽에 걸린 것들을 보았다. 하녀들의 앞치마와 다리미와 빨랫감 분류표가 걸려 있었고, 문 옆에는 주간 당번표가 붙어 있었다. 이름과 요일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 글자까지는 읽을 수 없었다.
"기사님, 저 이름이 비비예요. 베아트리체인데 다들 비비라고 불러요. 오늘 일은 진짜 죄송해요. 아가씨한테는 제가 혼날게요. 기사님은 아가씨 미워하시면 안 돼요!"
"영애를 미워할 이유는 없네."
"그럼 다행이고요!"
비비가 젖은 정복을 꼭 짜서 펼쳐 들었다. 시온은 그 얼룩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오늘 이 저택에 온 목적은 정원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원 대신 세탁실을 보았고, 하인 전용 계단과 복도를 보았고, 수다스러운 시녀에게서 계모의 조화 이야기를 들었다. 커피 한 주전자 값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정원 산책은 결국 반 시간으로 줄었다. 하인용 바지에 기사단 상의를 걸친 차림으로 공작 영애와 회양목 미로를 걷는 것은 시온이 감당할 수 있는 체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영애는 그 차림을 보고도 웃지 않았다. 다만 눈을 내리깔고 회양목 잎만 바라보며 걸었는데, 시온은 그것이 웃음을 참는 사람의 걸음이라는 것을 세 번째 모퉁이쯤에서야 알아차렸다. 어깨가 아주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영애."
"네, 네?"
"웃으셔도 됩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그런…."
영애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시온은 더 말하지 않았다. 웃음을 참는 용의자는 처음이었고, 그것을 수첩의 어느 칸에 적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로의 출구에 다다랐을 때, 영애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는 여전히 숙인 채였다.
"저, 아르덴 경."
"말씀하십시오."
"노아 경의 장례식에… 친척분이 한 분 오셨어요. 회색 프록코트를 입으신 분이요. 남부에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그분 구두에 붉은 진흙이 묻어 있었어요. 루미에르에는… 그런 흙이 없잖아요. 남쪽 운하 공사장을 빼면요."
시온은 영애를 내려다보았다. 영애는 그 말을 하는 동안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목소리는 작았고, 끝은 떨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경께서 노아 경에 관해 많이 물어보셨으니까, 혹시 쓸모가 있을까 해서요."
"…알겠습니다."
"네."
영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저택 쪽으로 돌아섰다. 비비가 현관 계단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영애의 남색 드레스 자락이 자갈길 위에서 사각거리며 멀어졌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펜 하워드는 시온의 하인용 바지를 보자마자 마부석까지 들릴 만큼 크게 웃었다. 시온은 그 웃음이 다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첩을 펼쳤다.
공작부인, 조화 여섯 번, 가장 큰 것. 무도회 강요. 동관 이 층 끝 방, 새벽까지 불. 세탁실 문 옆 당번표, 다음에 확인. 그리고 장례식의 회색 프록코트, 붉은 진흙.
그는 마지막 줄에서 펜을 멈추고, 그 줄을 쓴 자신의 글씨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영애는 그 남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프록코트의 색과 구두의 흙까지. 장례식 내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던 영애가.
그리고 그 붉은 흙이 남쪽 운하 공사장의 것이라는 것을, 북부 공작가의 영애는 어디서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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