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곱 번째 약혼자는 죽지 않는다5화 EN繁中

5화

해롤드가의 마구간

해롤드 백작가의 영지는 루미에르 서쪽 성문에서 마차로 두 시간 거리였고, 시온 아르덴이 그 저택의 녹슨 철문 앞에 말을 세운 것은 무도회 사흘 뒤의 이른 오후였다. 주인을 잃은 지 이 년이 넘은 저택은 손볼 사람이 없는 집이 대개 그렇듯 담장마다 담쟁이가 제멋대로 뻗어 있었고, 정원의 분수는 마른 지 오래인지 바닥에 낙엽만 수북하였다.

문을 열어 준 늙은 하인은 왕실 기사단의 문장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백작의 노모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손님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시온은 노모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마구간만 잠시 보고 가겠다고 말하였다.

"마구간이요? 그 말은 그날 바로 처분했는데요."

"말은 없어도 마구간은 있지 않소."

하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기사단 문장 앞에서 더 버틸 이유를 찾지 못했는지 뒤뜰 쪽을 가리켰다. 마부는 지난봄에 그만두었고, 지금은 마구간지기 노인 하나가 남은 말 두 마리를 돌보고 있다고 하였다.

시온은 뒤뜰로 걸어가며 품속의 수첩을 한 번 확인하였다. 굴드라는 노름꾼의 말대로 영애가 정말 이 마구간에 다녀갔다면 그날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부터 알아야 했고, 그러자면 사료 장부든 하인의 기억이든 이 집에 남은 것을 하나씩 뒤져 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구간은 돌로 지은 긴 건물로 칸이 여섯 개였는데, 그중 넷은 비어 있었고 맨 안쪽 두 칸에서만 말 울음소리가 났고, 문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구간지기 노인은 어디 심부름이라도 나간 모양이었다.

시온은 비어 있는 첫 번째 칸부터 들여다보았다. 바닥의 짚은 오래되어 눅눅하였고, 벽에 걸린 굴레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두 번째 칸도 다르지 않았다. 세 번째 칸 앞에 이르렀을 때, 칸막이 문 위에 걸린 낡은 나무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칠이 반쯤 벗겨진 글씨였으나 읽을 수는 있었다. 에보니. 에드윈 해롤드가 사교계 친구들 앞에서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흑마의 이름이었다.

칸 안에서 무언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누군가 마른 짚을 조심스럽게 밟는 소리였다. 시온은 허리춤의 검 자루에 손을 얹고 칸막이 문을 밀었다.

짙은 남색 승마복 차림의 여인이 여물통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장갑 낀 손에는 여물통 바닥에서 긁어낸 듯한 짚 부스러기가 한 줌 쥐여 있었고, 무릎 옆에는 작은 손수건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 무언가를 조금씩 덜어 담고 있던 참이었다.

여인이 고개를 들자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승마 모자 아래로 몇 가닥 흘러내려 있었다.

"…영애."

"아, 아르덴 경…?"

아델라이드 크로웰의 손에서 짚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 안쪽 칸의 말이 콧김을 내뿜는 소리만 들렸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시온이 먼저 물었는데, 목소리가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낮게 나왔다. 영애는 펼쳐 두었던 손수건을 황급히 접어 쥐고 일어섰다. 승마복 무릎에 짚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저, 저는… 해롤드 부인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그런데 부인께서 편찮으셔서 못 뵙고… 돌아가려다가…."

"돌아가려다가 마구간에 오셨습니까."

"…에드윈 경이 아끼던 말이 보고 싶어서요."

"그 말은 사고 당일에 처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영애가 입을 다물었고, 시온은 그녀가 쥔 손수건으로 눈을 옮겼다. 접힌 천 사이로 짚 부스러기와 함께 무언가 거무스름한 가루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 손수건, 보여 주시겠습니까."

"이, 이건 그냥…."

"영애."

시온은 손바닥을 위로 펴서 내밀었다. 증거물을 받을 때의 수사관의 손이었고, 영애는 그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수건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시온이 손수건을 펼치자 짚 부스러기와 오래된 귀리 껍질, 그리고 여물통 바닥의 틈에 끼어 있었던 듯한 마른 풀잎 몇 조각. 이 년 넘게 묵은 여물통에서 나온 것치고는 풀잎의 빛깔이 생각보다 선명하였다.

"이것을 왜 모으고 계셨습니까."

"…모르겠어요. 그냥, 이상해서요."

"무엇이 이상했습니까."

영애는 대답 대신 여물통을 내려다보았고, 시온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돌로 깎은 여물통이었고, 바닥에 틈이 몇 개 나 있었다. 이 년 넘게 아무도 청소하지 않았는지 틈마다 짚과 귀리 찌꺼기가 단단히 끼어 있었다.

"에드윈 경은… 말에게 늘 같은 귀리만 주셨어요. 남부 상인 것만요. 자루에 파란 닻 표식이 찍힌 거요. 그런데 제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는 자루가 바뀌어 있었어요. 붉은 동그라미가 찍혀 있었어요. 에드윈 경은 더 좋은 귀리로 바꿨다고 하셨는데…."

영애의 목소리는 거기서부터 점점 작아져 거의 짚 밟는 소리에 묻힐 지경이 되었다.

"…그때 그 말이 처음으로 저를 보고 귀를 뒤로 젖혔어요. 원래는 순한 말이었는데요."

시온은 손수건 위의 마른 풀잎을 다시 보았다. 말이 귀를 뒤로 젖히는 것은 경계하거나 흥분했을 때였다. 기병대 시절 그는 그런 말을 수십 마리 보았다. 그리고 그중 몇은 누군가 여물에 무언가를 섞었을 때였다.

"그 이야기를 경비대에 하셨습니까."

"아니요."

"왜요."

"…아무도 묻지 않았으니까요."

영애는 그 말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고, 시온은 승마 모자 아래로 드러난 그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무도회장에서 레모네이드 잔을 쥐고 있던 그 얼굴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묻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대답이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이 년 넘게 아무도 묻지 않았던 것을, 이 영애는 귀리 자루의 표식까지 혼자 기억하고 있었다.


아델은 고개를 숙인 채로 기사의 구두 끝을 보았다. 구두 앞코에 마구간 앞마당의 진흙이 묻어 있었다. 말을 매어 두고 바로 이리로 걸어왔다는 뜻이었다. 저택 하인에게 마구간의 위치를 묻고, 그 하인이 노모를 핑계로 그를 막으려 했을 것이고, 그는 기사단 문장으로 그것을 밀어붙였을 것이다.

역시 굴드의 말을 듣고 왔군.

그렇다면 지금 이 사람 머릿속에서 나는 사흘 전 무도회장보다 한 칸 더 범인 쪽으로 가 있겠지. 약혼자가 죽은 마구간에 혼자 몰래 와서, 여물통 바닥을 긁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 생각을 하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마구간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럴 가능성은 셈해 두었다. 다만 기사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 사흘이면 그가 굴드의 이름을 확인하고 해롤드가 마구간까지 찾아오기에 꼭 맞는 날수였다. 그녀가 오늘을 고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늦으면 이 여물통은 그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한발 늦었네, 아르덴 경. 아니, 한발 빨랐다고 해야 하나.

그때 마구간 문간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낡은 모자를 쓴 노인이 물통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들어서다가, 셋째 칸 앞에 선 두 사람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마구간지기인 듯한 노인의 눈이 기사단 정복에서 승마복 차림의 영애에게로 옮겨 갔고, 거기서 한참을 머물렀다.

"…크로웰 아가씨 아니십니까."

아델은 고개를 들었다. 노인의 얼굴은 낯이 익었는데, 이 년 전 초여름 에드윈이 그녀에게 흑마를 자랑하던 날 그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사람이었다.

"네. 오랜만이에요."

"아이고, 또 오셨네요. 그날도 아가씨 다녀가시고 사흘 만에 그 사단이 나서…."

노인은 말을 하다 말고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물통을 내려놓고 모자를 벗어 쥐었고,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아델은 노인에게 다가갔다. 겁먹은 영애의 걸음으로, 그러나 노인이 물러서지 못할 거리까지.

"저기, 어르신.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때 에드윈 경이 귀리를 바꾸셨잖아요. 새 귀리는 누가 가져왔었는지 기억하세요?"

노인은 눈을 끔뻑였고, 모자를 쥔 손이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돌아갔다.

"그게… 백작님이 직접 주문하신 건 아니고요. 어느 날 자루가 와 있었어요. 남부 상인이 견본이라고 놓고 갔다고, 백작님이 그러셨던 것 같은데. 아니, 아가씨네 댁에서 보내셨다던가…."

마구간 안이 조용해졌다. 기사의 펜이 수첩 위에서 멈추었고, 아델은 등 뒤로 그 시선을 느꼈다. 상견례 날 정원에서 어깨를 보던 그 시선이, 이번에는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저희 집에서요?"

"아, 아니, 제가 늙어서 기억이 오락가락해서요. 그 무렵엔 크로웰 댁에서 이것저것 보내오시는 게 많았으니까요. 약혼 선물이다, 인사다 해서. 그중에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노인은 그 이상 기억해 내지 못하였고, 아델은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물러섰다. 손끝이 얼음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차가웠다. 승마 장갑 안에서 손가락을 한 번 오므렸다가 폈다.

약혼 기간 동안 크로웰가에서 해롤드가로 보낸 것들. 그녀가 보낸 것은 손수 수놓은 손수건 한 장과 책 한 권이 전부였으니, 나머지를 누가 보냈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하였다.

공작부인은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약혼 선물도, 조화도, 언제나 제일 크게.

마구간 문간으로 걸어가는 동안 아델은 뒤에서 기사가 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반걸음 뒤, 호위하는 거리이자 관찰하는 거리였다.

"영애."

"…네."

"돌아가실 때 제 말 뒤를 따라오십시오. 서쪽 길은 해가 지면 위험합니다."

아델은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이 호의인지 감시인지는 묻지 않았는데, 아마 둘 다일 것이었다.

마구간 앞마당에 매어 둔 그녀의 회색 암말이 그녀를 보고 귀를 쫑긋 세웠다. 시녀도 마부도 없이 혼자 말을 몰아 서쪽 성문을 나선 것은 열여덟 살 이후 처음이었고, 돌아가는 길에는 원치 않는 호위가 하나 붙게 되었다.

서쪽 성문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아델은 장갑 안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약혼 기간에 크로웰 저택에서 해롤드가로 나갔을 물건들을 헤아렸고, 손가락이 다섯을 넘어가자 헤아리기를 그만두고 고삐를 고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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